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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교회의 토대이신 그리스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앞에 서면, 인간이 얼마나 오래 지혜의 근원을 찾아 헤매어 왔는지 생각하게 된다. 수많은 사유의 길이 펼쳐져도 삶을 떠받칠 단 하나의 중심이 없다면, 지식은 방향을 잃기 쉽다. 장재형 목사(미국 Olivet University 설립자)의 골로새서 설교는 바로 그 자리에서 교회를 향해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건넨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이 질문은 교리 시험의 한 문항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누구로 고백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토대가 달라지고, 신앙의 방향과 삶의 질서까지 달라진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직접 개척하지 않은 공동체를 향해서도 깊은 염려와 사랑을 품으며, 흔들리는 교회가 다시 붙들어야 할 중심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교회의 기초는 새로운 사상이나 정교한 말이 아니라, 창조와 구원의 주체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흔들리는 시대, 복음의 토대는 한 이름을 향한다

골로새 교회가 맞닥뜨린 위기의 깊이는 단순히 낯선 의견이 들어왔다는 데 있지 않았다. 영지주의와 가현설은 그리스도의 참된 성육신을 흐리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실제성까지 약화시키려 했다. 그래서 바울은 주변의 주장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논쟁하기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압도적으로 증언한다. 만물이 그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며,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한다는 선언이 교회의 흔들림을 멈추게 하는 토대가 된다.

여기서 기독론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설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흐리면 창조와 구원의 주권이 약해지고, 실제 육신을 부정하면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은 현실에서 분리된 관념이 된다. 바울의 고백은 예수께서 참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으며 동시에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임을 함께 붙든다. 교회가 이 균형을 잃지 않을 때, 복음은 사상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죄와 죽음에 실제로 닿는 구원의 소식이 된다.

복음의 힘은 무엇인가를 계속 덧붙이는 데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면, 교회는 그분 밖에서 더 완전한 구원이나 더 깊은 충만을 찾아 헤맬 이유가 없다. 신앙의 빈자리를 세상의 철학으로 메우거나, 예수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불안을 품는 순간 중심은 조금씩 이동한다. 그러나 말씀의 흐름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소유한 공동체이기 전에,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임을 일깨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기독론이 추상적인 신학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예수는 누구이신가"라는 물음의 대답은 예배의 언어가 되고, 공동체의 판단 기준이 되며, 성도의 일상을 하나로 묶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도 실제 선택은 인간의 욕망과 세상의 성과 기준에 맡긴다면, 입술의 신앙과 삶의 방향은 갈라지고 만다. 교회의 견고함은 규모보다 먼저 이 고백의 일치에서 시작된다.

공교한 말이 스며들 때, 믿음은 중심을 묻는다

바울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성도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한다고 말한다. 거짓은 언제나 거칠고 노골적인 모습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적이고 유익해 보이며,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길처럼 보일 때 마음 깊이 스며들기 쉽다. 설교가 세속주의를 교회의 중요한 도전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그것이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만족과 성과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세속주의가 복음을 밀어내는 방식은 대개 조용하다. 교회의 언어는 그대로 남아 있어도 성공과 풍요, 편의와 효율이 최종 판단자가 되면 그리스도의 주권은 형식 속에만 머물게 된다.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으로 축소되고, 공동체는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우는 몸이 아니라 결과를 생산하는 조직처럼 변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지식과 문화를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무엇이 복음을 섬기고 무엇이 복음을 대신하려 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이다.

본질을 지키는 싸움은 거친 배척이나 두려움의 언어로 완성되지 않는다. 설교의 흐름은 진리와 사랑, 단호함과 온유함이 함께 서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세상의 유익한 통찰과 기술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복음 위에 올라서거나 그리스도를 대체하려 할 때는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분별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폐쇄성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제자리에 놓는 믿음의 지혜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가"라는 질문은 그래서 오늘의 교회에도 날카롭다. 무언가를 배우고 활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는 없다. 철학도 기술도 제도도 그리스도의 충만 위에 군림할 수 없으며, 구원의 조건으로 덧붙여질 수도 없다. 믿음의 굳건함은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는 경직됨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영적 질서다.

성육신의 은혜는 사랑으로 몸을 얻는다

골로새서의 기독론은 성탄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멀리서 인간을 바라본 관념적 구원자가 아니라, 실제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성육신은 영적인 것을 높이고 육체를 낮추던 왜곡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와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왔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성탄의 중심이 분위기나 행사보다 먼저 주어진 사랑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탄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낭만적으로 되풀이하는 계절에 머물 수 없다.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경배한다는 것은 그분의 겸손과 희생을 교회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교리적 지식은 예배와 기도, 섬김과 책임으로 이어져야 하며, 사랑 안에서 연합한 공동체는 복음이 실제임을 세상 앞에 드러내야 한다. 성육신의 진리는 머리에서 끝나지 않고, 서로의 책임을 나누며 곁을 지키는 몸을 요구한다.

골로새서가 말하는 연합은 감정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 이루는 친밀함보다 깊다.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며, 서로에게 위로를 전하고 책임을 나누는 삶이 그 연합의 모습이다. 그리스도 안의 충만은 공동체를 자기만족에 빠뜨리는 풍요가 아니라, 타인을 향해 마음과 손을 열게 하는 부요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곁에서 사랑을 선택하고,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을 외면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간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교회의 연합도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얻는다. 함께 모이고 예배하며 기도하고 섬기는 일은 단순한 종교적 습관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을 가시적으로 고백하는 방식이다. 큰 공동체이든 작은 공동체이든, 서로를 영적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책임질 때 복음은 추상적인 문장에서 살아 있는 사랑으로 번역된다. 그리스도의 충만을 경험한 교회는 자기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받은 은혜를 세상을 향한 봉사와 선교로 흘려보낸다.

소망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세상을 품는다

바울은 육신으로 떨어져 있으나 심령으로 함께 있다고 말한다. 이 고백은 교회가 거리와 환경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된 한 몸임을 보여준다. 직접 만나지 못한 공동체를 위해 염려하고 기도하며, 그들의 믿음이 굳건해지기를 기뻐하는 마음은 교회의 사랑이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교회는 자신이 세운 울타리만 돌보는 집단이 아니라, 같은 주를 고백하는 이들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짊어지는 공동체다.

교회가 건물과 재정, 조직과 체계를 갖추는 이유도 이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들은 교회의 영광이 아니라 사명을 위한 도구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복음을 더 넓고 구체적으로 전하기 위한 그릇이다. 수단이 목적이 되는 순간 교회는 세상의 방식과 닮아가지만, 모든 자원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데 사용될 때 공동체는 세상 한가운데서 복음의 빛을 비춘다. 성탄의 기쁨과 재림의 소망 사이를 걷는 교회는 받은 사랑을 간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이 필요한 자리로 계속 나아간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시간을 맞는 자리에서도 이 소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다. 교회는 지나온 길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감사로 기억하고, 다가올 길에서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더 분명히 드러나기를 바라며 자신을 준비한다. 시작과 결론을 인간의 능력에 맡기지 않고, 창조와 구속을 이루시는 분께 맡길 때 실패와 갈등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이유가 생긴다. 소망은 사정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보다, 모든 것을 이끄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데서 자란다.

이 설교가 끝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화려한 성공의 전망이 아니라, 처음의 질문 앞이다. 교회의 생명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누구 위에 서 있는가에 달려 있다. 세상의 말이 더 정교해지고 성과의 기준이 더 매혹적으로 다가올수록, 신앙은 다시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멈추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예배와 선택, 관계와 섬김의 가장 깊은 기초에는 정말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이 놓여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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