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을 먼저 칠하는 화가처럼
1667년, 렘브란트 판 레인은 죽음을 불과 몇 해 앞두고 생의 마지막 걸작 캔버스 앞에 섰다. 〈탕자의 귀환〉이라 불리게 될 그 그림에서 그는 놀랍게도 붓을 빛이 아닌 어둠으로 먼저 가져갔다. 짙고 무거운 갈색과 검정이 화면을 가득 뒤덮었다. 그 칠흑 같은 어둠 한가운데서, 아버지의 두 손이 탕자의 등을 끌어안는 장면이 서서히 떠올랐다. 만약 그 어둠이 없었다면, 그 포옹이 그토록 눈부실 수 있었을까. 렘브란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빛의 가치는 어둠의 깊이에 비례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통찰은 회화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었다.
사도 바울 역시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로마서를 썼다. 복음의 찬란한 빛을 선포하기에 앞서, 그는 먼저 인간의 가장 어두운 민낯을 언어로 쌓아 올렸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 하나님의 진노가 선언되는 그 공간이 바로 바울이 캔버스에 칠한 어둠이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이 본문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죄의 실상을 직면하지 않은 영혼은 구원의 소식을 들어도 진심으로 감격하지 못한다고. 복음이 무감각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복음이 약해서가 아니다. 죄를 직면하지 않은 마음이 둔해진 탓이다. 어둠을 알아야 빛을 알고, 죄인임을 알아야 은혜를 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를 사랑이 아닌 진노로 시작한 깊은 이유다.
하나님을 마음 밖으로 밀어낼 때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 앞에서 잠시 멈칫한다. 우리가 오래 품어온 하나님의 얼굴은 온화하고 자애로운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신학적 통찰은 바로 그 당혹감을 복음 이해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진노는 무관심한 자의 감정이 아니다. 사랑했기에, 오래 기다렸기에, 그럼에도 끝끝내 외면당했기에 터져 나오는 감정이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거늘 내 백성은 알지 못한다"고 탄식하신다. 전능하신 분이 굳이 탄식하신다. 이것은 헬라 철학이 상상하는 초월적 무감정의 신이 아니라, 배반 앞에서 아파하시는 성경적 하나님의 진짜 얼굴이다.
불경건이라는 죄는 거창한 악행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조용히, 마치 습관처럼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어내는 작은 결정들의 반복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생겨난 빈자리를 돈과 명예와 쾌락과 인정욕이 채워 들어온다. 장재형 목사가 설교에서 거듭 강조하듯, 하나님을 내보낸 마음은 결코 비어 있지 않다. 더 작고 더 어두운 것들로 빠르게 가득 차오를 뿐이다. 창조주의 자리를 피조물이 차지하는 순간, 그 마음은 이미 보이지 않는 우상의 신전이 되어 있다. 하나님 없는 마음이 우상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뿌리가 썩으면 열매도 썩는다
불경건이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를 무너뜨린다면, 불의는 그 균열이 수평으로 번져 나간 필연적 결과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마음은 이웃을 향해서도 반드시 무너진다. 바울이 1장 후반부에서 열거하는 죄목들, 시기와 살인과 분쟁, 교만과 부모 거역과 무자비함은 먼 시대의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회라면 세대를 막론하고, 문명의 수준과 무관하게 반복되어 온 인류의 풍경이다.
성경 묵상을 역사 위에 얹어 보면 이 진단은 더욱 선명해진다. 고대 로마는 전성기에 엄격한 질서와 도덕률을 자랑하던 제국이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와 감각적 쾌락 앞에 내면의 뿌리부터 서서히 썩어 들어갔고, 화려한 문명의 열매는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의 현실도 같은 시선으로 읽는다. 구조화된 부정부패, 해체되는 가정, 깊어지는 공동체의 균열, 반복되는 폭력. 이 모든 불의의 실체적 뿌리는 결국 하나님을 외면한 불경건이라는 진단이다.
바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죄는 개인의 일탈에 머물지 않는다. 공동체가 묵인하고, 제도가 정당화하며, 문화 전체가 부추기는 단계로 이행한다는 것이 32절의 경고다. 그 구조 안에서 살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그 일부가 되어 있다. 복음의 빛이 비추지 않는 자리에 이 어둠은 스스로, 자동으로 들어차는 것이다.
가장 짙은 어둠이 복음의 시작점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붓을 내려놓지 않는다. 렘브란트가 어둠을 칠한 이유가 결국 빛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듯, 바울이 이토록 집요하게 죄의 실체를 폭로한 이유도 단 하나다. 구원의 은혜를 온전히, 가감 없이 드러내기 위함이다.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설립)의 설교가 이 지점에서 가장 뜨겁게 빛난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을 영원히 정죄하여 끝장내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돌이키게 하려는 사랑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3장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선언하다가, 바로 다음 숨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선포한다. 이 극적인 반전이 복음의 심장 박동이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진 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그 자리에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선포하듯, 하나님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다.
장재형 목사가 로마서 1장을 통해 오늘의 성도들에게 건네는 도전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 한가운데 무엇이 앉아 있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조용히 그 자리를 빼앗은 다른 무언가인가. 죄의 실상을 직면한 자만이 복음 앞에서 진심으로 무릎 꿇는다. 로마서 1장의 묵직한 진실은 우리를 영원히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게 하는 은혜의 강한 손길이다. 어둠을 깊이 직면한 자만이 빛의 진짜 가치를 알듯, 자신이 죄인임을 온전히 알게 된 자만이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온몸으로 깨닫는다. 그것이 2천 년을 넘어 이 말씀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 심령을 뒤흔드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