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설교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지식을 늘려 주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초점을 바꾸어 주기 때문이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의 로마서 11장 강해는 바로 그 범주에 든다. 그는 '이스라엘의 실족과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열어, 선택과 유기, 심판과 회복, 공의와 자비라는 성경의 축들이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며 빛을 주고받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여기서 전개되는 내용은 장재형(장다윗)목사 설교문 '이스라엘의 실족과 이방인의 구원'의 요지에 기대어 구성되었고, 로마서 11장의 흐름을 따라 남은 자의 신학과 감람나무 비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선언의 목회적 함의를 해설한다. 이 서술은 원문을 충실히 따르되, 문맥을 분명히 하고 표현을 다듬어 독자가 더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첨삭한 해설적 에세이로 읽힐 것이다.
로마서 11장은 한 문장으로 불붙는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사도 바울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럴 수 없느니라." 장재형목사는 이 확언을 '언약의 기억'이라는 프레임으로 독해한다. 엘리야 시대, 다수가 바알 앞에 무릎을 꿇었어도 하나님은 무명의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 다수의 실패 속에서도 역사를 꺼뜨리지 않는 은총의 등불, 그것이 남은 자의 신학이 지시하는 바다. 여기서 남은 자는 혈통이나 전통의 자동성이 아니라 은혜에 응답한 신앙의 주체다. 구원의 기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은 은혜로만 설명된다. 장재형목사는 만약 이 출발점을 놓치면 로마서 9-11장은 배타주의의 근거로 오해되기 쉽다고 경고하면서, 구원의 문법을 "전적인 은혜"라는 축 위에 다시 세운다. 이때 '남은 자'라는 개념을 엘리트주의로 오독하지 말아야 한다. 남은 자는 특권층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는 이들의 보편적 정체성, 곧 감사와 회개의 리듬을 잊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의 실족이 이방인의 구원과 맞물려 있다는 역설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하게 하려 함"이라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전개를 냉소나 복수의 장치로 읽지 않는다. 그는 비극이 역전의 발판이 되는 섭리, 곧 하나님이 실패마저 구원의 동력으로 쓰시는 '거룩한 역설'을 본다. 넘어짐이 끝이 아니라 회복의 문턱이 될 수 있다는 이 역설은 개인의 삶에도 적용된다. 반복되는 낙심, 성취지상주의의 피로, 관계의 균열 속에서도 회개로 돌아설 때 하나님은 그 실패를 은혜의 조형물로 빚어 새로운 소명을 부여하신다. 실족과 회복의 이 리듬을 기억하는 공동체는 타인의 추락을 비웃지 않고, 타자의 일어섬을 기대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설교 내내 냉소를 경계한다. 냉소는 진리를 지키는 용기가 아니라 은혜를 잊은 피로감에서 나온다.
감람나무 비유는 이 역설의 미학을 가장 또렷하게 도식화한다. 믿지 않는 원 가지가 꺾이고 돌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았다는 이미지는 이방 신자들이 은혜의 뿌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시에 경고가 들어 있다. 접붙임을 받았다고 해서 뿌리보다 자신을 자랑할 수 없다. 장재형목사는 이 비유를 오늘의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반(反)교만의 명령으로 해석한다. 은혜의 자리를 오랫동안 점유한 공동체일수록 경건은 습관으로, 열정은 규범으로 굳어지기 쉽다. 그때 비유는 묻는다. "뿌리가 너를 받쳐 주는가, 아니면 네가 뿌리를 받쳐 주는가?" 이 질문은 은혜의 기억을 행정 절차나 문화적 우월감으로 오염시키지 말라는 호소다. 장재형목사가 힘주어 강조하는 포인트는 이것이다. 가지가 잘리는 사건은 하나님 편에서의 임의적 변덕이 아니라, 은혜를 공로로 전환한 자아의 경직이 낳은 비극이라는 점. 동시에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시 접붙이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에 회개는 실제적인 희망의 문이 된다. 준엄하심과 인자하심을 함께 보는 통전적 시선이 현대 교회에 긴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취가 신원 확인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환경에서 은혜의 기억은 쉽게 희미해진다. 그러나 은혜는 갚아야 할 채무가 아니다. 은혜는 맡겨진 소명 안에서 흘려보내야 할 원천이다. 장재형목사는 "은혜를 자산화하는 순간 신앙은 계산이 된다"고 말한다. 계산은 즉시 비교를 낳고, 비교는 곧 교만으로 변질된다. 반대로 은혜를 원천으로 기억하는 순간, 책임은 조건이 아니라 열매가 된다. 봉사와 금식, 선교와 학문적 정진은 구원의 증빙 서류가 아니라 은혜의 향기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통로다. 이런 관점 전환이 일어날 때, 실패는 도덕적 파산이 아니라 회개의 문이 되고, 성공은 자기확증이 아니라 감사의 제목이 된다.
로마서 11장의 정점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선언이다. 이 구절을 두고 학계의 해석은 다양하다. 민족적 회복, 공동체의 표상, 종말의 포괄적 자비 등 여러 노선이 공존한다. 장재형목사는 한 해석을 과잉 확정하기보다 바울이 전개하는 구원사의 카메라 워크를 따라간다. 초점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일부가 우둔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배제의 판결이 아니라 임시적 신비라는 데 맞춰진다. 핵심은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서로의 구원사에 상호참여하도록 엮으셨다는 점이다. 각자의 불순종이 각자의 자비를 비추는 배경이 되고, 그 연쇄는 결국 모두를 긍휼로 품으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증증(增證)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문장이 언약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사람의 불충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동시에 그 약속은 신앙 없는 회복을 면허하지 않는다. 은혜는 회개를 통과하여 열매 맺도록 부름받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역설을 정직하게 품는 태도를 요청한다. 이스라엘은 복음으로 보면 원수 된 자일 수 있으나, 택하심으로 보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다. 이런 긴장을 지킬 때만 교회는 타자를 포용하는 언약의 인류학을 회복한다.
실천적 차원에서 장재형목사는 두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교회 공동체는 '시기하게 하는' 복음의 미학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배타적 우월감을 자극하는 비교심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이 주는 의·평강·희락의 아름다움이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갈망을 일으키는 상태를 뜻한다. 삶의 질, 관계의 신뢰, 일과 쉼의 리듬, 정직한 언어, 약자에 대한 배려가 공동체의 기본값이 될 때, 복음은 설명 이전에 매혹이 된다. 둘째, 신자 개인은 경외의 감각을 훈련해야 한다. 경외는 두려움의 문화가 아니라 뿌리 의식이다. 뿌리가 우리를 붙들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성공 앞에서도 떨고, 실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경외는 자랑을 감사로, 낙심을 소망으로 번역하는 영적 언어다.
선교와 전도에 관한 관점도 바뀐다. 흔히 우리는 '확장'과 '숫자'의 언어로 선교를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11장의 빛 아래서 선교는 먼저 '접붙임'의 사건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군가를 자신의 생명에 접붙이시는 장면을 경외함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면 열정은 줄지 않지만 조급증은 사라진다. 결과를 조작하려는 욕망 대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는 고백이 자리 잡는다. 이 신학은 전략을 무력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략의 동기를 정화한다. 선교는 성과주의의 말초적 흥분이 아니라, 은혜의 리듬에 참여하는 기쁨이 된다.
현대의 복잡한 현실을 고려할 때,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요청하는 겸손과 경외는 더욱 절실하다. 특정 국가나 집단을 무비판적으로 신학화하는 태도는 우상화로 기울기 쉽고, 반대로 역사적 상처를 무시한 채 승리주의적 언어만 반복하는 것도 복음의 영성과 거리가 멀다. 로마서 11장은 단순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남은 자의 신학은 소수의 우월감이 아니라 은혜 앞에 무릎 꿇는 사람들의 보편적 자세고, 감람나무 비유는 선민과 후민의 서열화를 승인하는 교리가 아니라 모두가 같은 뿌리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은유다. 이런 인식이 자리 잡을 때 교회는 진영의 언어를 넘어 복음의 섬세한 윤리를 살아낼 수 있다. 약자와 타자, 소수자와 이웃을 대하는 정서가 변하고, 언어가 달라지고, 의사 결정의 기준이 바뀐다. 경외는 윤리의 바탕이자 공동체의 기초 감정이 된다.
신학의 종착지는 예배다. 바울은 결국 찬양으로 글을 닫는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이해가 완성될 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경외로 성숙할 때 예배는 시작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결말을 신앙의 최종 양식으로 제시한다. 우리가 붙든 해답이 아니라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 때문에 예배하는 사람은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는다. 대학 캠퍼스의 경쟁과 비교, SNS의 가속도, 불확실한 진로의 긴장 속에서도, 은혜의 뿌리가 나를 붙들고 있다는 확신은 삶의 파고를 이길 내적 관성을 선물한다. 그는 남은 자의 길을 걷는다. 소수가 되는 길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는 다수의 길을 여는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장엄한 신학적 결론이자 일상의 소명 선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을 교회와 사회, 개인과 공동체의 경계면에 가져다 놓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누구의 것으로 사는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이 질문이 불편함을 낳는다면, 그것은 좋은 신호다. 우리는 여전히 은혜의 학교에서 배우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실패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고, 교만한 이방인을 경고하시며, 회개하는 자를 다시 접붙일 능력을 지금도 갖고 계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희망을 포기할 이유도, 자랑할 권리도 없다. 필요한 것은 선한 시기를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과, 뿌리를 바라보며 떠는 경외뿐이다. 그 경외가 우리의 윤리를 바꾸고, 우리의 언어를 정화하며, 우리의 공동체를 치유한다. 복음은 이렇게 삶이 되어 퍼져나간다.
마지막으로 설교자의 태도에 관해 덧붙이자.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는 본문을 과감히 파고들되 텍스트의 권위를 개인의 카리스마로 대체하지 않는 점이 돋보인다. 그는 해석의 긴장과 목회의 현장을 분리하지 않고, 본문이 우리를 해석하게 내어주며, 그 해석이 회개와 겸손, 새로운 순종으로 이어지도록 안내한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정보가 아니라 방향을 준다. 은혜가 무엇인지, 은혜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은혜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묻는 질문을 잊지 않게 만든다. 이 신학적·목회적 균형감각이야말로 로마서 11장을 읽는 오늘의 교회가 긴급하게 회복해야 할 덕목이다. 우리의 시선이 다시 뿌리를 향할 때, 접붙여진 가지로서의 겸손과 기쁨은 자연히 자라나고, 그 겸손과 기쁨은 세상 속에 복음의 향기를 오래 남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