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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사도행전 1장으로 읽는 하나님의 나라

사도행전 1장은 신약성경 전체의 관문이자 교회의 자기이해를 규정하는 핵심 텍스트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실제 역사와 공동체 속으로 파고들어 확장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1장이 제시하는 신학적 좌표를 오늘의 현실에 연결하며, 신앙이 교회 안에서만 선포되는 개념이 아니라 가정과 일터와 도시의 구체적 삶 속에서 체현되어야 하는 '살아 있는 복음'임을 강조한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했다면, 사도행전은 그 이후의 전개, 곧 성령의 임재 아래서 교회가 어떻게 증언 공동체로 서 가는지의 역동을 기록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역동'이 특정 시대에 국한된 기적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성령으로 재현되어야 할 교회의 표준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장은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오늘의 독자에게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현재형의 초대장이다.

부활 후 40일 동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는 진술은 새 시대의 논리를 응축한다. 제자들이 "지금 이 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나이까"라고 물을 때, 그들의 기대는 민족 정치의 수복에 머물렀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예수님의 응답-"때와 기하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가 그 기대를 부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더 큰 지평을 열어 준다고 읽는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한 민족의 경계를 넘어,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증언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확장되는 우주적 통치이며, 그 통치의 방식은 권력의 집중이 아니라 복음의 확산, 지배의 강제가 아니라 사랑의 설득이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했지만, 그 충만한 완성은 아직 남아 있으며, 바로 그 사이를 사는 교회가 성령으로 '기다림'과 '나아감'을 동시에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1장의 장면 전환은 웅장한 성전이 아니라 작은 다락방으로 향한다. 마가의 다락방은 사회 권력의 중심부가 아닌, 연약하고 변방처럼 보이는 곳이었지만, 바로 그곳이 새 시대의 발화점이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 숨 쉬고 있다고 본다. 메시아가 왕궁이 아닌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오셨듯, 성령의 불은 화려한 제도와 과시의 중앙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는 작은 공동체 위에 붙는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이 온 덩어리를 변화시키듯, 보이지 않는 씨앗이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신적 통치의 습속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도 작음과 주변부를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작은 순종과 숨은 기도가 역사를 건너가는 하나님의 방식임을 알 때, 우리는 숫자와 외형의 숭배에서 벗어나 성령이 머무시는 자리, 곧 낮아짐과 사랑의 자리로 자신을 옮기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그 자리에서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약속은 이사야 11장이 예언한 메시아 위의 영-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의 은총이 교회에게 확장되는 사건의 전주곡이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 세례를 교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각인하는 하나님의 인장으로 설명하며, 그 결과로 교회는 단지 올바른 교리를 가진 모임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존재론적 변화에 들어선다고 말한다. 증인됨은 의견을 말하는 수준이 아니라, 삶 전체로 예수의 생명을 드러내는 전 인격적 기여다. 그래서 사도행전 1:8은 교회의 지도를 그려 준다. 예루살렘은 나의 일상, 유대는 나의 도시, 사마리아는 낯설고 불편한 경계, 땅끝은 내가 상상하지 못한 타자의 자리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도를 따라 복음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 가장 먼 곳으로 흘러가야 한다고 권면하며, 가정이 작은 예루살렘이 되고, 직장이 작은 사마리아를 품고, 지역사회가 땅끝을 향한 발판이 되는 실천을 촉구한다.

성령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기다림'은 수동적 체념이 아니다. 약속을 신뢰하며 기도로 자신을 준비하는 능동적 대기이며, 성령이 임하실 때 즉시 '나아감'으로 이어지는 순종의 태세다. 장재형 목사는 이 두 축이 분리될 때 생기는 왜곡을 경계한다. 기다림만 남으면 내향적 영성에 갇혀 세상과 단절되고, 나아감만 남으면 인간적 열심으로 소진되어 복음이 사랑의 향기를 잃는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가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담대히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두 축의 균형 속에서 성령의 권능이 실제로 그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이 거리의 설교자와 이웃의 돌봄꾼이 된 장면은, 성령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의 살아 있는 도상이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의 교회가 다시 이 길을 걸어야 한다고, 조직의 업적보다 성령의 열매가 먼저여야 한다고, 탁월한 전략보다 십자가의 사랑이 앞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 세상은 여전히 불의한가"라는 질문 앞에서 장재형 목사는 '이미/아직'의 긴장을 다시 불러낸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씨앗으로 임했고 자라고 있으며, 동시에 마지막 날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허무와 체념으로 물러서지 않고, 완성의 소망을 품고 현재의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가 작은 평화를 실천한다. 이 때 복음 전도와 사회적 선행은 대립하지 않는다. 내면의 회심이 사랑과 공의의 행위로 열매 맺을 때, 복음은 '선한 소식'이라는 제 이름을 회복한다. 장재형 목사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삶의 우선순위로 재배치하라고 하며, 그 핵심 동력은 여전히 성령의 임재라고 말한다. 설득의 논리보다 더 깊은 설득, 곧 성령이 마음의 문을 여시는 역사가 있어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 메시지는 그의 설교와 강연, 간증 영상들-예를 들어 tv.naver.com/v/78037540 같은 자료들-을 통해 구체적 사례와 함께 반복적으로 선포되어 왔다.

개인주의가 일상이 된 시대에 공동체성은 선택 사항처럼 여겨지지만, 사도행전 1장은 '한마음으로 모여 기도함'이라는 단서로 새 시대의 문을 연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사사화(私事化)를 경계하며,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우리'의 언어와 구조 속에서 전개된다고 말한다. 서로의 연약함을 덮고, 재능을 나누며, 기쁨과 눈물을 함께하는 코이노니아가 성령의 통로다. 교회가 내부적 갈등을 복음으로 다스리고, 세상적 경쟁 논리가 아닌 서로 섬김의 질서로 재구성될 때,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단지 설교의 문장이 아니라 공동체의 공기처럼 느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공기를 '평화와 소망'으로 설명하며, 이사야의 비전-해됨과 상함이 없는 왕국-과 요한계시록의 약속-눈물과 아픔이 씻겨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교회의 오늘로 당겨 온다. 작은 화해, 작은 정직, 작은 배려가 모일 때, 하나님 나라의 큰 숲이 자란다.

고난의 문제는 사도행전적 교회가 피할 수 없는 주제다. 바울의 고백-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은 낭만적 위안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체험되는 리얼리티다. 장재형 목사는 고난을 회피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 한복판에서 성령이 하시는 새 창조의 일을 보라고 권한다. 어둠의 두께가 두꺼울수록 빛의 선명함이 드러나듯, 십자가의 낮아짐 속에서 부활의 높아짐이 시작된다. 그는 교회가 세상의 성공주의를 답습해 초라함을 숨기려 할 때, 성령의 권능이 아닌 인간의 기술에 의지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교회의 힘은 언제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령의 위로와 권능이다. 그 힘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 않고, 더 깊은 섬김과 더 넓은 포용으로 이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교회는 핍박 속에서 흩어지지만, 흩어짐이 곧 복음의 확산이 되는 역설을 산다.

예술의 세계도 새 시대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갈망을 반영한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하나님의 생기가 인간에게 건너오는 장엄한 순간을 포착하고,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점들을 그린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성령이 불어넣는 새 생기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신자의 상상력을 어떻게 깨우는지 설명한다. 또 존 밀턴의 『실낙원』이 잃어버린 낙원과 회복의 가능성을 문학적으로 제시하듯, 성경은 에덴의 회복을 실재의 약속으로 선포한다. 사도행전 1장은 바로 그 회복의 본격적 개시를 알린다. 회복은 죽어서 가는 저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늘 이 땅에서 씨앗으로 시작해 누룩처럼 스며들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결실하는 장거리 경주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이 경주의 중간 지점에서 낙심하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성령이 빚어 가시는 속도를 존중하라고 말한다.

실천의 차원에서 그는 "가까운 곳부터, 작은 것부터, 지금 여기서"라는 세 단어를 자주 상기시킨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땅끝까지 나아갔던 초대교회의 궤적처럼, 신자는 자신의 내면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심는다. 친절한 말 한마디, 정직한 거래, 약자를 위한 배려, 갈등 앞에서의 화해 제스처-이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가 공간과 관계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예배당 안에 머물러 있으면 다락방은 될 수 있어도, 세상의 빛은 될 수 없다고 경고한다. 다락방의 기도가 거리의 사랑으로 흘러 들어갈 때, 도시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향기를 맡는다.

결국 장재형 목사가 일관되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새 시대는 이미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시작되었고,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 안에 불붙었으며, 지금도 증언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땅끝으로 나아가고 있다. 로마의 권력도, 역사의 폭풍도 이 흐름을 꺾지 못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이 "아무 금하는 이 없더라"는 자유의 선포를 남기는 이유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냉소 대신 소망을, 분열 대신 화해를 선택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말한다는 형식으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임재와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교회를 다시 사도행전적 궤도로 돌려놓는 유일한 길임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상기시킨다. 우리의 발걸음 하나가 씨앗이 되고, 우리의 기도가 비가 되며, 우리의 섬김이 흙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숲이 자라난다. 사도행전 1장은 그 숲의 첫 싹을 보여 주었고, 장재형 목사는 그 숲을 향해 함께 걸어가자고 손을 내민다. 이미와 아직 사이, 약속과 성취 사이, 다락방과 거리 사이를 오가는 이 여정에서, 우리는 성령의 권능으로 오늘의 증인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장재형 목사가 평생 붙들고 전해 온 복음-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소식-이 우리의 도시와 시대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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