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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동역의 힘

아래 글은 로마서 16장을 중심으로, 초대교회 공동체에 스며 있던 아름다운 동역의 정신과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을 정리한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과 그 신앙적,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바울의 인간미와 공동체성'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함께 고찰해 봅니다.

1. 로마서 16장에 나타난 바울의 다양한 동역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의 풍성함

로마서 16장은 언뜻 보면 바울이 개인적으로 문안 인사를 전하는 '부록(附錄)'과도 같은 장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장은 로마서라는 위대한 서신을 마무리하는 결론이자, 초대교회 공동체의 면모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살피다 보면, 겉으로는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문안하는 내용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는 초대교회가 갖고 있었던 폭넓고도 견고한 네트워크, 사랑과 헌신으로 빚어진 동역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바울이 한 번도 직접 가 보지 않았던 로마의 공동체에 대해 이토록 상세히 알고, 이름 하나하나를 잊지 않고 거명하며 안부를 묻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살아 있는 관계망(relationship network)'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장에는 약 서른네 명의 이름이 직접 호명됩니다. 다만 학자들에 따라 루포의 어머니(롬 16:13), 네레오의 자매(롬 16:15) 등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인물들을 포함하면, 바울이 기억하고 있던 로마 교회 성도가 최소 스물여덟 명 이상으로 확인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들을 살필 때 눈여겨볼 것은 남성과 여성, 유대인과 이방인, 귀족이나 왕실 출신과 노예 등 다양한 사회계층이 교회 공동체 안에 함께 들어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다양성과 포용성, 그리고 친밀한 사랑의 교제야말로 초대교회가 가졌던 힘의 근원이자, 동시에 복음이 지중해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편지 첫 부분(롬 16:1-2)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는 인물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 뵈뵈(Phoebe)입니다. "우리 자매 뵈뵈"라고 부르며,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16:2)고 소개하는데, 이는 뵈뵈가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상당한 지원을 바울에게 베풀었음을 시사합니다. 이 편지를 로마까지 전달하는 자로서 바울이 뵈뵈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녀가 신뢰할 만하고, 적극적인 헌신을 감당할 수 있었던 동역자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자신을 지지하고 후원하며, 함께 동역하는 다양한 남성·여성 지도자들을 폭넓게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조력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세워주는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줍니다.

바울이 문안하는 또 다른 인상적인 인물들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사도행전 18장이나 고린도전서 16장 등 다양한 바울 서신을 통해서도 자주 언급되는 이들은, 언제나 아내 브리스가(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남편 아굴라보다 먼저 등장한다는 점이 주목을 받곤 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부분은 아내인 브리스가의 신앙적 역량이나 교회 내 영향력이 남편보다 컸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어쨌든 이 부부는 바울과 함께 텐트메이커(tent maker)로서 생업을 공유했을 뿐 아니라, 목숨을 걸고 바울을 지지했던 충성스러운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두고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내놓았다"(16:4)고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이들 부부의 집을 통해 가정교회가 서고(16:5),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도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돌본 흔적이 성경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에 가정교회가 얼마나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알려주고, 동시에 초대교회가 공간이나 시스템보다 '사랑과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확장되어 갔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16:5)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맺은 첫 열매"라고 언급되는데, 이는 바울이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먼저 회심한 인물을 뜻합니다. 첫 열매라는 표현 속에는 바울의 각별한 사랑과 기억이 들어 있으며, 실제로 에배네도가 어느 시점엔가 로마로 옮겨 가게 된 사연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며 문안을 전하는 모습에서 그 깊은 애정이 드러납니다.

이외에도 마리아(16:6), 안드로니고와 유니아(16:7),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6:12), 그리고 버시(16:12)처럼, 여성 신도들도 많이 거명됩니다. 특히 유니아(Junia)는 여성 사도였는지 아니면 남성 사도였는지에 관한 논쟁이 교회사에 있었으나, 전통적인 다수 견해는 대체로 여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바울은 이들을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진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초대교회가 직면한 많은 제약 속에서도 여성들이 교회와 사역 현장에서 적극 참여하고,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로마서 16장에서는 노예 신분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이름도 눈에 띕니다. "암블리아"(16:8)나 "우르바노"(16:9)와 같은 이름은 로마 제국 시대, 특히 노예들에게 흔히 지어졌던 이름이라 합니다. 바울이 이들을 "나의 사랑하는 암블리아" 또는 "우리의 동역자 우르바노"라고 부른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하나 됨을 실천하고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벽을 허무셨던 복음의 궁극적인 힘입니다. 초대교회에는 귀족이나 왕실 출신뿐 아니라, 종이나 여성, 이방인이나 유대인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고, 그 모두가 복음을 통해 새롭게 연합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처럼 다양한 이름들을 거론하며, 각 사람이 자신에게 혹은 복음 사역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 친척"이라고 지칭하는 이들도 몇몇 나오는데(예: 16:7, 16:11, 16:21), 이는 바울이 가족 전도에도 열심을 냈고, 또 그의 친족들이 복음 안에서 동역자가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가족들이 곧곳곳의 교회에 흩어져 동역하게 되는 모습에서, 복음이 확장되는 과정을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을 보면,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이끌려 갔을 때, 로마 교회 성도들이 소식을 듣고 멀리 삼관(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나와 바울을 영접했다는 장면이 나옵니다(행 28:15). 바울은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초대교회의 특성이 드러납니다. 어떤 이방 땅이든, 어느 도시든 이미 바울이 심어 놓은 복음의 씨앗과 그 씨앗을 함께 키워가는 동역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목숨이 위태로워도 기꺼이 서로 도우며 영적 유대감을 심화시켰습니다. 이런 친밀한 연대와 공동체적 사랑이, 바울을 비롯해 많은 사역자들이 고된 선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게 해 준 힘이었습니다.

로마서 16장 전체가 이러한 애정 어린 이름들의 나열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복음은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거나, 교리적으로만 논쟁하는 차원을 넘어, 실제로 서로를 지지·섬기·위로하며 함께 성장해 가는 공동체 안에서 완전히 실현된다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본 서신의 초기부터 복음의 교리를 심도 있게 다뤘습니다(1-11장). 12장 이후에 실천적 권면을 거쳐, 마지막 16장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복음이 "사람들과의 관계, 동역의 사랑, 한 몸 된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두고, "바울이 전한 복음은 머릿속의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것이었고, 그 복음 안에서 가장 큰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섬길 줄 아는 공동체성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 준 장면이다"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가 교회사에서 수없이 확인하듯,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말로만 퍼져 나가지 않습니다. 말만 앞서고 실제적인 관계나 헌신이 결여된다면, 교회는 금세 퇴색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뜨거운 사랑과 인간적인 온기로 사람을 세우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름으로 기억하며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일으키는 순간, 복음은 살아 움직여 세상 곳곳으로 뻗어 갑니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가 분열과 상처, 혹은 소통 부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로마서 16장이 보여 주는 이 '인명록(人名錄)' 속에 담긴 초대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아무리 말로 설명하고 강조해도, 실제 생활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며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이 없다면, 그 말은 빈 메아리로 끝날 것입니다. 바울이 직접 이름을 부르며 칭찬하고 문안하는 동역자들의 존재는, 교회란 서로가 '한 몸'임을 확인하고 서로를 높여 주며 기뻐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비로소 참 교회가 될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달갑지 않은 이슈나 인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이면 반드시 영적 전쟁이나 분열, 마찰이 일어날 수 있음을 바울도 알았습니다. 로마서 16장 17-18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을 멀리하라"고 경고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공동체 안에 들어왔으면서도 내면은 전혀 복음의 정신과 상반된 태도로 살아가는, 이기적이고 분열을 일삼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 자들을 가려내고 교회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이 서로를 깊이 알고 진실된 교제를 나누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교회에 표면적인 친교와 가짜 위로, 아첨만 가득하고 서로를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면, 그 틈을 노리고 들어온 분열 세력이 공동체를 어지럽힐 것은 자명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합니다(16:19). 즉 선한 일에는 깨어 있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되, 악한 의도가 감지될 때는 '그런 것에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멀리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초대교회가 양적인 팽창만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깊은 영적 분별력을 통해 악의 침투를 막고 선과 진리를 따라 일치하는 공동체성을 지향했음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 상하게 하시리라"(16:20)고 선언합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은, 결국 영적으로 보면 사탄의 도구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교회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또한 '평강'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평강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고요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가져다주는 총체적이고도 적극적인 안식과 안전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평강이 교회를 지킬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에게도 그 동일한 확신을 심어 줍니다. 교회는 환경이 어떠하든, 사탄이 틈타려 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 마지막 부분(16:21-23)에 이르면,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있던 동역자들이 로마 교회에 문안을 보냅니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를 비롯해서, 바울의 친척 누기오, 야손, 소시바더 등이 등장합니다. 디모데는 빌립보서 2장에서 묘사되듯 바울의 '영적 아들'로서, 바울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바울이 전할 말도 대신 전할 수 있는 참된 동역자였습니다. 야손은 사도행전 17장에서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영접하다가 소동이 일어나 붙잡혀 간 적도 있었고, 소시바더(소바더)는 베뢰아 사람으로 행 20장에 언급되어 바울의 선교 팀에 합류했던 이로 알려집니다. 여기서도 느낄 수 있듯, 초대교회는 끊임없이 사람과 지역, 사건이 서로 얽혀 복음의 흐름을 이어 갑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16:22)라는 언급입니다. 당시 바울은 직접 자필로 쓰기보다는 주로 대필자를 통해 자신의 서신을 완성했는데, 이 로마서의 경우는 더디오(Tertius)라는 인물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주로 교회 일꾼들 중에 글쓰기에 재능이 있거나, 바울의 구술을 충실히 받아 적을 수 있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단순히 '서기(書記)' 역할만이 아니라, 바울과 깊이 교감하며 복음서신을 남기는 데 기여했습니다. 더디오는 편지 말미에 자기 이름을 살짝 언급해, 마치 "이 서신에 내 손길도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이를 통해서도 바울의 사역이 결코 '나 홀로'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가이오"나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 그리고 "형제 구아도"가 문안하는 장면(16:23)까지 나오는데, 가이오는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직접 세례까지 준 인물이며, 에라스도(Erastus)는 고린도 시에서 재무관으로 일하던 관리로 추정됩니다. 교회 안에 지위 있는 관리가 들어와서 함께 복음을 섬겼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초대교회는 노예부터 왕족, 관료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복음은 신분의 장벽을 넘나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의 로마서 16장 마지막 부분은, 그 어떤 교리적 설명보다도 강력하게 '공동체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일종의 증언이 됩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들이 한데 모여 서로 얽히며, 사랑의 연대로 서로를 세워 갑니다. 바울이 "이름을 아는 것" 그리고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은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의 이름은 결코 잊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기억한다'는 의미이자, '우리가 같은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재차 확인하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들에게 진정 이러한 영적 가족으로서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오늘날 교회 안에 소외되어 이름 한 번 불러 주는 이 없는 이들은 없는지, 혹은 서로에게 상처와 분열을 주는 이들이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풍성하게 꽃피웠던 이 '깊은 교제와 동역의 힘'을 현대 교회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이들이 서로 돌보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눈물 흘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복음의 신비와 능력, 그리고 공동체를 견고히 세우시는 하나님의 지혜

로마서 16장의 결말부(특히 25-27절)는, 바울이 이 위대한 서신을 마무리하며 선포하는 일종의 영광송(doxology)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 나타나신 바 되었다"(16:25)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 즉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 안에 이미 예언되어 왔으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기까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에 계시(revelation)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16:26)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이 복음이 단지 바울 혼자 '발명'하거나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고,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안에서 결국 전 인류가 듣고 순종하도록 계획되어 있던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민족(all nations)"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온 이방 세계로 확장되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로마서 전체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음을 설명해 왔으니, 결론부에서도 그 주제의 정점이 다시금 강조되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전반부에서 '복음의 교리적 진술'을 장황하게 다뤄 왔다면(예: 이신칭의,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 등), 마지막 장에서는 구체적 인간관계와 공동체의 실천을 통해 그 복음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16장 25-27절에서 다시금,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복음의 능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명확히 밝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며, 교회가 분열과 마찰, 세속적 유혹을 넘어 복음 위에 확고히 서게 되는 비결도 결국 복음 그 자체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교리나 신학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신 복음이 교회를 강건히 세우는 기초가 됩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16:27)라는 문장은, 이 편지 전체를 관통하는 결론이자 찬양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셔서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던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셨고,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의 로마서 전체 내용을 그 한 문장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사도 바울은 교리의 체계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고, 또 그 안에서 모든 민족이 하나로 연결되는 놀라운 신비와 능력을 믿고 노래했다. 그리고 그런 구원의 기쁨이 그의 실제 삶과 동역자들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로마서 16장의 마지막 찬양은 바로 그 감격의 절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바울의 삶은 끊임없는 박해와 투옥, 배신과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기쁨을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한 개인의 구원에 그치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견고케 하며, 그 복음을 들은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힘이 있음을 믿었기에, 이렇게 장엄한 찬송으로 편지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 16장을 대할 때, 특히 이 마지막 영광송을 통해 묵상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실제로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가"입니다. 복음이 없으면 교회 공동체는 결코 자기 힘으로 견고히 설 수 없습니다. 또한 복음이 없이 교회 안의 다채로운 사람들이 하나로 합해지는 일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복음은 죄로 분열되고 자기중심성이 만연한 인간 내면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이 복음이 너희를 견고하게 하리라"고 확신을 주고, 동시에 모든 인류가 믿어 순종하게 되기를 열망합니다.

이 계시의 비밀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세워 나가는가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 기준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지혜나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영광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해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눈부시게 빛나는 로마서 16장의 목록처럼, 우리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도 작은 이름들이 하나하나 의미 있고 소중한 '주님의 동역자들'로 기록되어 가야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의 서두(1:1-7)부터 말했던 것처럼, 로마 교회 역시 바울의 직접적인 개척 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겸손히 섬기며 형제·자매로서 묶인 동역자를 자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먼저 깨달은 자로서, 또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소명으로서, 로마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도록 돕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교리적 가르침에서부터 시작해, 편지 말미엔 감동적인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문안'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바울의 방식을 보면, 복음의 핵심과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SNS와 다양한 온라인 소통 수단으로 누구든 빠르게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표면적인 관계가 많아지고 진정한 사귐과 헌신이 약화되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의 이름들을 떠올리며, 우리가 '정말 내 마음을 열고 사랑하고 있는 동역자'가 누구인지, 또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진정으로 돌아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 생활 속에서도 "서로 문안하라"는 권면은 단순히 형식적 인사를 건네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16:16)고도 말했는데, 이는 당시 문화권에서 친밀함을 표현하는 인사이자, 서로를 귀히 여기는 상징 행위였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 문화에서 그대로 똑같이 적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긴 하지만, 그 정신만큼은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환대와 존중으로 맞이하며, 한 가족으로 여기는 태도 말입니다.

로마서 16장은 다음과 같은 요점을 우리에게 선명히 전합니다. 첫째, 복음이 이끄는 참 교회 공동체는 남녀·노예·왕족·이방인·유대인 등 그 어떤 벽도 허물고 함께 모이는 살아 있는 신앙 공동체다. 둘째, 이 공동체는 바울이 보여 준 것처럼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이름을 불러 주며, 함께 고난과 기쁨을 나누면서 성장한다. 셋째,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다른 이들의 신앙을 해치는 이들은 반드시 경계해야 하고, 동시에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한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넷째, 궁극적으로 교회를 견고하게 하시는 분은 복음이시며, 그 복음은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계획하신 '신비의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 계획의 절정이다. 다섯째, 이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찬양하며,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16장의 본문을 여러 차례 설교하면서,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의 이름이 일일이 언급되는 것은, 그저 바울이 사교적이어서가 아니라, 복음의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갖게 되는 뜨거운 연결성과 헌신을 드러낸 것이다. 교회는 곧 사람이며,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안다면, 서로의 짐을 지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가족이자 동역자가 된다. 그 점에서 로마서 16장은 복음서나 사도행전 못지않게 귀중한 교회의 실제 모습을 보여 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곤 합니다.

실제로 이 말씀을 우리 시대와 현실 속에서 적용해 본다면, 다양한 부서나 소그룹으로 분화되어 운영되는 교회 조직 안에서, 정작 구성원 개개인이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이름조차 낯설어 상대를 대하기가 어색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보다도 교역자나 리더십(목사, 장로, 교사 등)이 먼저 나서서 사람들의 실제적 필요를 돌아보고 이름을 기억하고, 각 사람의 상황에 민감해지는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냥 예배당에 모였다가 각자 흩어지는 모임이라면, 로마서 16장에서 보여 준 진정한 교회의 활력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현대 교회가 대형화·비인격화되는 흐름을 막기 위해서라도, 초대교회의 '가정교회 모델'과 같이 서로의 일상과 믿음이 긴밀히 교류되는 장(場)이 필요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어디로 가든지 자기 집을 열어 복음을 나누고, 바울의 가르침을 함께 공유하도록 섬겼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오픈(open)되어야 합니다. 물론 시대적·문화적 차이가 있어 그대로 흉내 낼 수는 없지만, 가정이나 소모임에서 서로의 삶과 기도를 나누고, 교회가 단순한 '종교행사장'이 아닌 '진정한 영적 가족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가 요청됩니다.

아울러 바울이 마지막까지 잊지 않았던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려 함이라"(16:26)는 구절을 생각해 볼 때, 교회의 공동체성과 선교는 떼려야 뗄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이미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복음이 퍼져 나가며, 실제로 이교의 중심지인 로마에까지 교회가 세워지는 선교 열정을 실현해 냈습니다. 그 배경에는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동역자들의 헌신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주고받았던 문안과 기도와 영적 지원이 선교의 탄력을 배가시켰습니다. 교회가 '내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완수하려면, 더욱 긴밀한 연대와 나눔이 절실합니다. 장재형목사가 "교회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세상을 품고 열려 있어야 하는 생명 공동체다"라고 자주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로마서 16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교회의 최종 목적이며, 그 영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복음의 신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복음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결코 잊지 않고, 교회가 지니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며, 선을 이루는 데 지혜로운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는 '선교의 완성'이라는 더 큰 꿈을 품고, 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날을 바라보며 달려갑니다. 바울의 로마서가 전개해 온 모든 가르침과 논증, 그리고 그 결론부인 16장에 이르러 드러난 풍성한 교제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매우 시의적절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개인 신앙에만 갇혀서 "나는 구원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멈춰 선다면, 바울이 펼쳐 보인 이 광대한 복음 네트워크와 공동체성의 실제를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신앙이 결코 개인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과 공동체에 충만히 스며들어야 함을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눈병이나 투옥 등 여러 신체적·환경적 한계를 가졌음에도, 늘 복음을 위해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수많은 동역자가 있었고, 서로 간에 진실한 사랑과 섬김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토록 많은 이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 자체가 복음이 살아 있는 증거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많은 곳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 채, 단지 '예배에 참석하는 개별 손님'처럼 스쳐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로마서 16장 속 그림처럼, 서로가 서로를 알고 사랑하고 헌신하며 복음으로 하나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증거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때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16:26)는 또 다른 시대와 또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이 주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복음은 살아 있는 인격들의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그 복음이 교회를 견고케 하며(16:2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16:27),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만든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 상하게 하시리라"(16:20)는 약속은, 교회 안에 혹여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하며, 우리에게는 선과 사랑에 대한 열심을 놓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복음 안에서 진정한 형제·자매가 되어 연대할 때, 그 힘은 고린도, 에베소, 빌립보, 예루살렘, 로마 할 것 없이 세상 어디로든 퍼져 나갑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바울이 기억하고 지칭한 이름들, 곧 뵈뵈, 브리스가와 아굴라, 에배네도, 마리아,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버시, 루포와 그의 어머니, 아리스도불로의 권속, 헤로디온, 나깃수의 가족들, 아순그리도와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의 자매, 올름바 등 많은 이름 뒤에 담긴 '동역의 기쁨과 헌신'을 우리 현실 속에서도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에서 함께 있던 디모데, 누기오, 야손, 소시바더, 더디오, 가이오, 에라스도, 구아도 등 역시 각자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동역자로 삼았던 그 모습, 곧 자신이 가진 재능이나 자원을 아낌없이 공유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공동체가 세워지도록 헌신한 태도를 본받는 것이야말로, 로마서 16장 강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적용점이 됩니다.

더 나아가, 장재형목사와 같은 현대 사역자들이 초대교회의 이러한 원리와 역동성을 되살리기 위해 무척 애쓰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가 불거지고, 세상이 교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수록, 우리는 다시금 초대교회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단순히 "옛날 초대교회는 좋았지" 하고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소박하게, 주일마다 만나는 지체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는 것이나, 어려움에 처한 성도를 돌보는 것이나, 낯선 이가 교회에 왔을 때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고 환대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작은 일들이 모여 초대교회를 재현하는 큰 힘이 되고, 복음의 능력이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통로가 됩니다.

로마서 16장은 로마서를 이해하는 데 결코 부차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장에서 바울의 깊은 사랑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해진 인간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확인합니다. 이름 없는 이들조차도 하나님의 복음 역사에서는 중요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왕실이나 노예나 모두가 복음의 '한 그물' 안에서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선포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16:25-27)이라는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교회와 삶도 이 찬양의 고백 안에 늘 거하도록, 우리는 복음 안에서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며, 사람과의 관계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바울적 태도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공동체가 곧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꿈을 이뤄 드리는 일에 쓰임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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