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증거로 나타나시고,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성령 강림절(오순절)을 기다리는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도행전 1장은 결국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장이며, 교회의 토대가 형성되는 시점이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마가의 다락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셔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이 기간은 제자들에게서 절망과 불신이 사라지고, 부활을 통해 확정된 예수님의 주권과 능력이 그들 안에 자리 잡는 중대한 시간이 되었다. 이 40일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장재형 목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해왔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핵심과, 곧 이 땅에 임할 성령의 강림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의 '기적적 사건' 정도로만 이해하고 그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정비하시고, 그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아버지께 구한 성령을 기다리라"(행1:4 참조)고 명령하셨다. 그 결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다. 이는 그들 안에 여전히 잠재해 있을 수 있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결정적 선택이었다. 공포와 살기의 기운이 가득한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가 모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실 때 자신들이 흩어졌던 '실패'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어떤 위협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신앙적 결단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잡히시는 장면을 복음서들(특히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누가복음 22장, 요한복음 18장)에서 읽어보면, 제자들이 겪었던 공포와 혼란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로마 군병과 성전 수비대가 무장하고 예수를 체포하러 왔을 때, 제자들은 도망쳤다.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다시금 부활 신앙으로 무장되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부활 신앙이 가진 위대한 능력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스승의 죽음 이후에 흩어져서 갈릴리로 내려갔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 한복판에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 '마가의 다락방'이 있었다.
마가의 다락방은 복음서에서도 이미 중요한 현장으로 거론된다. 전통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신 장소로도 자주 언급되어 왔으며, 초대교회가 태동하는 발판을 제공한 '은밀한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다. 사도행전 1장 13-14절을 보면, 제자들은 그곳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었다. 예수님이 생전 "너희는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신 가르침을 그들은 이제 체득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오순절을 기다렸다. 그들이 모였던 다락방은 당대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와 적대적인 시선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동시에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긴장감도 감돌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두려움과 긴장'의 공간에서 하나님을 붙드는 기도와 성령의 약속을 바라보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차 역설해왔다.
부활 신앙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이라는 놀라운 사실 자체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실제로 임한다'는 확신으로 이어지게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분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했고, 그분의 말씀이 결코 거짓이나 헛된 것이 아님을 몸소 체험했다. 동시에 그들은 이제 예수님이 떠나신 뒤에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동일한 능력과 사랑으로 교회를 이끌어가실 것이라는 약속을 붙들게 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남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를 계속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마가의 다락방"이 곧 "교회의 시작점"이라고 해석한다. 교회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 이 작은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기도하며, 약속된 성령을 기다리는 장면이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는 바로 이 마가의 다락방에서부터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무명의 어부와 세리였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자,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붙는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한 설교로 3천 명이 회개하고, 5천 명이 새로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행2:41, 4:4). 이는 "너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마5:13-14)는 예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된 결과였다.
사도행전은 영어로 'The Acts of the Apostles'라고 불린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그것이 '사도들'의 행적이라기보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역사'라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자주 강조한다.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보내신 성령의 능력이 교회를 시작하고 확장해가는 주된 원동력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을 읽는 신자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현장을 목도하게 되고, 그 첫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맥락을 현대 교회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회가 건물이 크고 재정이 풍족하다고 해서 부흥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세상의 권력이나 지식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영혼구원의 열매가 맺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는 바울의 가르침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생생히 믿고,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그 '본질'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본질'을 지키는 자리, 그것이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다락방이었다.
이 다락방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의 공포, 제자들이 배신했고 자신들이 실패했다는 자괴감, 그리고 또다시 붙잡히고 처벌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동시에 간직한 장소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언을 서로 확인하고, "우리가 다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자"라는 믿음의 결단이 모아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성령이 강림하시는 순간, 이 다락방의 폐쇄성과 두려움은 송두리째 뒤집혔고, 오히려 세상을 뒤집는 역동적인 복음 운동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다락방은 우리에게 '교회의 근원'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종종 현대 교회들이 "다락방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영성이란 곧 "깨어 기도하며 말씀을 붙드는 태도"를 말한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마가의 다락방을 상징적으로 바라볼 때, 그곳은 인간적인 두려움이 드리운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늘 문을 여는 시작점'이 되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 역시, 개인의 삶에서나 교회 공동체에서나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더라도, 다시금 부활 신앙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모여 뜨겁게 기도한다면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장재형 목사는 자주 강조하는 바,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거룩한 두려움'의 공간과 감람산(올리벳)이 상징하는 '자유로운 기도의 공간'을 같이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감람산에서 기도했고, 또 그곳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셨다. 하지만 그들이 모여서 완전히 하나 되어 기도했던 실제 장소는 예루살렘 안쪽의 다락방이었다. 즉,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무거움(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신앙(감람산),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비로소 부활 신앙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아무리 감람산에서 많은 은혜를 누린다 해도,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실제적인 기도'와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되는 마가의 다락방은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 되어야 하고, 어떤 마음으로 성령을 간구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신앙적 모범이 된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역사의 흐름이 결코 '과거 한 시점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각 사람의 '마가의 다락방'은 따로 있을 수 있다. 교회마다, 혹은 개인의 삶마다 시시각각 찾아오는 고난과 불안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기도하며 성령을 구하는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 단지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나를 살리고, 공동체를 새롭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이어가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시작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이었듯이, "나의 신앙 부흥 또한 어떤 형태로든 '다락방'에서 시작된다"는 영적 의미를 삶에 적용해야 한다.
부활은 곧 능력이요, 성령의 나타나심은 곧 교회를 움직이는 핵심 에너지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결론이자, 요점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40일 동안의 가르침,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기도 등이 종합적으로 드러난다. 이 모든 조각들이 합쳐져서, 우리가 곧 읽게 될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어지고, 놀라운 세계 복음화의 첫걸음이 떼어진다. 그렇기에 그 시작점인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은 단순히 한 건물이나 역사적 현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영적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2. 맛디아의 선택
사도행전 1장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함께, '열둘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빠진 빈자리를 채우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자들이 12명이어야 한다는 것은 단순 숫자 맞추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영적 체계로서의 의미가 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 배신조차도 이미 예언된 일이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성경의 성취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행1:16-20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빠진 한 자리'를 채우는 것이 교회의 사명을 이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 제자들이 취한 방식이 흥미롭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 베드로는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며, 주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 자격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그날까지 쭉 함께 다녔던 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지켜본 자, 그리고 "부활하심을 증언할 수 있는" 자가 사도로 세워져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결국 2명의 후보(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 그리고 맛디아)가 선출되고, 기도하며 제비를 뽑았을 때 맛디아가 뽑혔다(행1:23-26).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부활신앙"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사도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그것을 담대히 선포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맡는 일이다. 베드로가 제시한 "부활을 증언할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준은, 무엇보다 그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음을 '살아 있는 증거'로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예루살렘의 공포스러운 분위기, 세상의 조롱과 핍박을 무릅쓰고서라도,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확신 있게 말할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을 것이다.
사실 제자들 모두가 부활을 이해하기 전에는 크게 두 부류로 갈렸다. 하나는 "예수님이 죽었으니, 이 모든 것도 끝났다"라고 낙담하고 고기 잡으러 돌아간 부류(요21장에 등장), 다른 하나는 조금이라도 가슴에 희망을 품고서 "주님이 다시 살아나실 수도 있지 않을까?"를 기대하던 소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여러 차례 나타나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먹고 마시는 장면을 제자들이 목격하자, 이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인간적인 낙담과 절망을 안고 도망쳤던 이들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모인 원동력이 바로 '부활 신앙'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12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는 배신으로 인해 사도의 권위를 잃었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사도행전 1장 18-19절에 유다의 죽음이 언급된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은 30에 넘겼으며,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도 인간의 악함이 드러난 사건'으로서 매우 쓰라린 일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가룟 유다가 지녔던 '탐심'과 '정치적 욕망'이 결합했을 때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지적한다. 그가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유대 민족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 메시지가 자신이 원했던 길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배신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배신은 영적 파멸로 이어졌고, 그 자리를 맛디아가 채우게 되었다.
맛디아의 선택을 통해 제자 공동체는 다시 12라는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는 곧 "하나님 나라의 문이 다시 반듯하게 세워진 것"을 상징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언급할 때마다, "회복"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이며,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빠진 자리를 회복시킴으로써, 초대교회는 '흔들림 없는 질서' 안에서 성령을 맞을 준비를 갖추게 된다. 만약 이 상태로 그냥 넘어갔다면, 예수님이 떠나신 뒤 제자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더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과연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고,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으로 '어떤 공동체적 분란'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기도로써, 그리고 말씀을 붙들어 '부활 신앙을 증언할 만한 자'를 사도로 뽑음으로써 이 문제를 질서 있고 평화롭게 해결한다.
이때 눈여겨볼 점은 제비뽑기라는 방식이다. 고대 유대문화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제비'를 뽑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전통이 있었다(잠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장재형 목사는 이 제비뽑기가 단순 운이나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뢰하는 태도를 담았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미 두 사람(바사바와 맛디아)은 모두 자격이 검증된 이들이었고, 이제 최종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 제비를 뽑았을 때 맛디아가 선택되었다. 제자들은 이 결과에 순종하고, 맛디아를 새로운 사도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곧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하나의 '순종의 모델'이며, 교회 안의 갈등 혹은 지도자 선출 과정에서 보여주는 '질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룟 유다가 빠진 자리를 맛디아가 채운 이 사건은 사실상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 공동체가 가장 먼저 치른 '공동체적 과업'이자, '공적 결단'이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부활 신앙은 각 개인이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우리의 허물과 상처를 정리하고 회복하여, 온전한 질서와 구조를 회복하겠습니다"라는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 결단이 끝나자마자,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맞이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은 혼란과 분열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를 통해 회개하고 질서를 갖춘 공동체 위에 강력히 임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역사적 장면이다.
맛디아가 이후 사도행전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장재형 목사는 그 이유가 "그의 사역이 덜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가 기록해야 할 초점이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복음이 로마에 이르는 이야기에 맞추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맛디아는 사도 중 하나로서 분명히 복음을 전파하며 초대교회 성장에 공헌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주로 베드로의 전도여행, 그리고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이방을 거쳐 결국 로마에 이르는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맛디아 개인의 세부적인 사역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가 사도로 임명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빈자리를 대신했다는 점이 기록된 것은, 초대교회가 부활 신앙에 기초해 구조적·영적 회복을 이루었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맛디아의 선택 과정을 '현대 교회의 지도자 세움'과도 연결 지어 설명한다. 교회의 지도자(목회자, 장로, 선교사 등)를 세울 때는 단순히 학벌이나 경력, 말솜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의 실제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말씀에 근거한 회개와 순종의 삶을 지속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그런 기준을 분명히 세웠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목격했고, 부활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로, 지도자 한 명을 세우는 일이 교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깊이 고민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질서와 순종의 자세로 진행해야 한다.
맛디아가 선택된 것은 가룟 유다의 배신이라는 깊은 상처로부터 공동체가 회복되는 사건이었다. 단지 12명의 숫자를 맞추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가 정식으로 다시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맞았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리고 "사도의 수가 충만해져야 한다"는 깨달음 속에서, 맛디아가 선출되는 과정을 거치며, 그들은 이제 완전한 팀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할 준비를 끝낸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우리가 교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이야기한다. 교회는 단순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름받고 세워지는 사연이 있고, 그것이 합쳐져서 하나님의 큰 그림을 이룬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중 한 자리도 함부로 여겨서는 안 되며, 만일 누군가가 무너지거나 떨어져 나갔다면, 기도로써 하나님이 지정하신 자를 다시 찾아 그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
결국 사도행전 1장의 맛디아 선택 이야기는 초대교회가 내부적 상처와 결손을 극복하고, 부활 신앙을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가리켜 "교회 공동체의 치유이자, 성령 강림의 초석"이라고 평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간의 가르침, 그리고 승천하실 때까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신 명령, 제자들이 한마음으로 모여 기도한 마가의 다락방, 그곳에서 가룟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는 과정까지.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며,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이라는 새 시대의 서막을 여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와 같은 흐름이 결국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Great Commission)과 직결된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는 것이었고, 사도행전은 바로 그 복음 전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로마에 이르기까지(사도행전 28장) 전개되는 과정을 기록한다. 이러한 역사적·구속사적 움직임에 있어서, 마가의 다락방과 맛디아의 선택은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중요한 모멘텀이다. 만약 제자들이 유다의 배신에 낙담해서 흩어져 버렸다면, 혹은 12사도의 체제를 회복하지 못해 내부적으로 분열과 갈등에 휩싸였다면, 사도행전에 기록된 놀라운 복음 전파의 역사는 큰 장애물에 부딪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분열 대신 기도를 택했고, 낙심 대신 부활 신앙을 붙들었으며, 무너진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 맛디아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비한 '마지막 준비 단계'가 되었다. 따라서 사도행전 1장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형성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교회가 왜 '부활 신앙에 기초한 질서' 위에 세워져야 하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세우거나 리더를 임명할 때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장재형 목사는 강조한다. "교회의 본질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부활의 신앙과 성령의 역사에서 온다. 그리고 그 역사를 실제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남아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제자들처럼,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맛디아의 선택은 단순한 사도 교체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부연하여,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도행전 1장의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고 말한다. 가룟 유다의 배신이라는 중대한 위기가 있었으나, 그것이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새로운 사도가 세워지고, 교회는 더 견고하게 정비되었다. 이는 "교회는 사람의 공로나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며 교회 안팎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이나 낙심할 만한 상황을 접할 때, 초대교회가 보여준 이 모습에서 지혜와 용기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은 실패와 배신마저도 교회의 정화를 위한 과정으로 바꾸어 내며, 성령의 새 시대를 여는 준비로 삼으신다.
이로써 사도행전 1장의 맥락이 분명해진다.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이 어떻게 교회가 시작된 자리인지를 확인했고, 그 가운데서 부활 신앙으로 모인 제자들이 "맛디아를 선택하여" 교회의 완전한 틀을 회복함으로써 오순절 성령 강림을 향해 나아가는 서사가 이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을 거듭 강조하면서,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공동체 안에서 질서와 순종을 지켜갈 때,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고 복음의 통로가 되는 본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은 초대교회가 부활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성령을 기다린 기도의 장소이자 공동체의 태동지다. 맛디아의 선택은 그 공동체가 내부적 상처와 결손을 회복하고, 오순절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부활 신앙은 개인의 고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와 공동체적 결단을 통해 더욱 온전해진다"는 교훈을 남긴다. 장재형 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사도행전은 그 자체가 "성령의 나타나심"이며, 부활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지 보여주는 결정적 기록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예루살렘에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맛디아를 선택함으로써 12사도의 체제가 회복되는 순간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장재형 목사는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부활 신앙과, 가룟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는 맛디아의 선택을 통해 교회 공동체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초대교회의 본질이 "부활과 성령에 근거한 교회"라는 사실을 재확인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며, 이 시대의 교회들도 이 본질을 붙들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