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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감격 - 장재형목사

 

Ⅰ. 큰 기쁨으로 주를 찬양하는 구원의 감격

시편 126편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성전에 올라가 예배하며 찬양했는데, 그 과정에서 시편 126편을 자주 불렀다고 한다. 특별히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뜨거운 감격과 감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시는, 그들의 구원받은 기쁨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1~2절)"라는 고백은, 해방의 순간을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이 느꼈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을 잘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가리키며, "우리도 구원받았을 때의 그 놀라운 감격을 늘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 동안 치뤘다. 낯선 땅에서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 자유로운 삶, 그리고 무엇보다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때가 되어 성취되었을 때, 그들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환희를 체험했다. 이 시는 바로 그 해방 직후의 신앙고백이요 찬양이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3절)"라는 고백은,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과 감사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하게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맥락에서 시편 126편을 설명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신 거대한 구원에 대해 그 백성이 부르짖는 찬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깊이 파고든다. 그 본질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셨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감사와 기쁨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래한 "꿈꾸는 것 같은" 기쁨은,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해방된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정치적·지리적 포로 상태에서 해방된 사건이 신약 시대의 성도에게는 '죄 사함과 영적 구원'의 진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은, 마치 죄의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릴 수 있다.

실제로 이사야 40장에도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사 40:1~2)"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 예언은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차서 해방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어,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약의 역사적 사건이 신약의 구원 사상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강조하면서, 사도행전 2장에서 초대교회가 보여준 모습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도행전 2장 47절의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 안에는 '구원받은 기쁨'이 넘쳤다. 회심하고 세례받은 이들은 날마다 하나님께 찬송을 돌렸고, 그들 자신이 즐거운 예배 공동체가 되었다. 이처럼 구원의 기쁨은 곧 찬양으로 이어지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 나누어지는 역동적 '생명력'을 낳는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4절)"라는 구절에서 언급된 '남방 시내들'은 이스라엘 남쪽의 네게브 사막을 가리킨다. 건기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메마른 땅이지만, 우기가 되면 물이 흘러 시냇물이 생기고 꽃이 피어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 네게브 사막에 내리는 시냇물에 비유했다. 곧, 메마른 땅이 물로 인해 활기를 얻고 꽃이 피어나듯,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하면 백성의 삶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의미다. 이러한 시적인 표현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각자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인생이 아무리 건조하고 힘겹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면 마른 땅이 생명을 회복하듯 놀라운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두고,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교회가 아무리 침체되어 있어도, 성령의 부흥과 역사로 말미암아 활력을 되찾고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시대를 분별하며 부흥을 사모해야 하며, 동시에 그 부흥의 불씨를 살려 세계 선교의 초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구원의 감격이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자연스럽게 찬양이 넘치고, 그 찬양은 다시 선교와 구제, 봉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5~6절)"는 구절은 많은 성도들에게 '씨를 뿌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눈물'과 '기쁨'이 동시에 강조된다. 포로에서 돌아온 뒤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폐해진 땅을 개간하고, 비와 해를 바라며 간절하게 농사를 짓는 수고가 필요했다. 그러나 눈물로 힘써 씨를 뿌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기쁨의 열매를 허락하신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분명한 약속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삶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한다. 개인의 영적 삶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와 교회 공동체에서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계 선교 현장에서도 이 '씨 뿌림'의 원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처럼, 성도는 전도와 선교의 현장에 진리의 말씀을 뿌리고, 사랑과 은혜를 뿌리고, 나눔과 헌신을 뿌려야 한다. 그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결국 "기쁨으로 거두게 하실 것"이라는 성경적 약속을 굳게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처럼 시편 126편은 포로 생활에서의 해방, 그것을 통한 구원의 감격, 그리고 그 감격을 이어가는 찬양의 중요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이 구원의 찬양은 단지 일회성 감정 폭발이 아니다. 공동체가 날마다 불러야 하는 지속적인 선포요 고백이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모이기를 힘썼듯이, 오늘날 교회 역시 구원의 복음을 가슴에 품고 찬양해야 하며, 그 찬양은 자연스럽게 선교적 열정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이 찬양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담고 있으며, 특히 죄의 포로 된 인간을 해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또한 시편 기자가 말한 '남방 시내들 같은 해방'은 아무리 메마른 사막 같은 인생이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기초이자 힘이다. 모세가 홍해 앞에서 두려움에 떨던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행진했듯이, 죄에서 해방된 성도들 역시 마른 땅이던 영혼이 시냇물을 받은 것처럼 새 힘을 얻어 찬양하게 된다.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여러 모습으로 '포로 상태'를 체험한다. 인생의 문제가 얽혀 있기도 하고, 육체의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마음이 무거워질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복음을 통해 죄에서 자유케 되었다면, 그 해방감이야말로 "꿈꾸는 것 같은" 기쁨을 부어준다. 그리고 그 기쁨이 넘칠 때, 입술에는 자동으로 찬양이 흘러나오게 된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말한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는 표현의 현대적 적용이 될 것이다.

결국 시편 126편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첫 번째 핵심은, 하나님의 큰 구원으로 인해 부어지는 '기쁨과 찬양'의 본질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가리켜 "구원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자연스러운 열매"라고 말한다. 즉, 죄 사함을 경험한 자가 하나님 앞에 서면,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오직 은혜로 인한 기쁨'이 찬양으로 표현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찬양은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원천이 된다. 바벨론 포로처럼 길고 긴 침체와 아픔의 시기를 지나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실 때 얻게 되는 그 환희는, 바로 이 시편의 기자가 노래한 그 감격과 다르지 않다.

Ⅱ.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의 선교적 사명

시편 126편 5~6절에 나오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는 말씀은, 현대 교회 선교와 전도 사역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이 황폐해진 땅을 일구며 씨를 뿌리듯, 오늘날 교회도 "영적 씨"를 세상에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가리켜, 선교가 얼마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지 잘 표현한다고 해석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모습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실제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릴 때, 땀을 흘리고 때로는 실패도 경험하면서 어렵게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과 고난이 뒤따른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 땀과 눈물의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 반드시 '기쁨의 곡식 단'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약속한다. 전도와 선교 역시 그러하다. 사람들의 무관심, 거부, 반대, 심지어 박해까지도 감수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뿌린 씨는 언젠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의 법칙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신약 성경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와 사도 바울이 전한 "전파하지 않으면 어떻게 들으리요(롬 10:14)"라는 말씀을 연결 지어 설명한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결과를 보장받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그 씨앗은 자라 열매를 맺게 된다. 물론 돌밭, 가시떨기밭,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적게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옥토에 떨어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한다. 선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을 거부할 수 있지만, 언젠가 옥토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여 거듭나고, 또다시 복음 전도자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20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선교학계에서는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라는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이는 교회가 '자기 확장'을 목적으로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고 계시므로, 교회가 그 부르심에 동참해야 한다는 신학적 관점이다. 과거에는 교회 중심의 선교, 곧 "교회에 들어오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다소 폐쇄적이고 교권 위주의 사고가 강했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하나님 중심의 선교"로 전환되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톨레미적 세계관에서 태양 중심의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으로 바뀌었듯, 교회 중심 선교에서 하나님 중심 선교로 패러다임이 변화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선교적 전환이 시편 126편 5~6절의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교회가 자신의 확장만을 위해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신 구원의 역사에 겸손히 동참하는 마음으로 헌신할 때, 비로소 온전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뜻이다. 전 지구적으로 선교가 필요한 시대에, 돈이나 명예, 혹은 교세 확장 같은 육체적 동기로 씨를 뿌리는 것은 금물이다. 대신 오직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선교에 임해야 한다. 이때 비록 눈물과 희생이 따를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기쁨의 단을 반드시 거두게 된다.

현대 교회는 더 이상 지역적·제도적 경계를 지키는 것으로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세계화(Globalization)와 정보화(Information technology)의 흐름 속에서, 인터넷과 위성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전 세계가 '한 지붕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스타링크(Starlink)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어디에서든 제한 없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는 복음 전파에 있어 결정적 변곡점이 될 수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적한다. 통제되고 막혀 있던 나라들, 성경 소지가 금지된 지역들에서도 인공위성 통신을 통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창구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거대한 기술 발전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바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로서의 결단이다. 이 기술을 단순히 세속적인 이익이나 취미생활의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돈을 "만 악의 뿌리"라고 하며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친다(딤전 6:10, 마 6:24). 그러나 선교적 목적, 하나님 나라 확장의 목적을 위해 기업인이 비즈니스를 운영한다면, 그 재물은 더 이상 하나님께 대적하는 우상이 되지 않는다. 대신 교회 공동체와 세계 선교의 큰 자원이 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의 정체성을 '모이는 교회'(교회 내부의 예배·교육)와 '흩어지는 교회'(세상으로 나아가는 선교·전도)로 이분하여 설명한다. 전통적인 교회는 주일 예배와 같은 '모임'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흩어짐'을 통해 '세계로 가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직접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 16:15)"고 명하셨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하셨기 때문이다. '모이는 교회'가 교회 성장의 한 축이라면, '흩어지는 교회'는 그 성장의 열매를 세상에 나누어주는 또 다른 축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In and Out"이라고 요약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교회는 교육과 예배를 통해 성도를 양육해야 하고, 동시에 세상으로 파송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축이 함께 작동될 때, 시편 126편의 약속처럼 눈물로 씨를 뿌린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 또한 교회는 '선교의 아방가르드(Avant-Garde)'이자 '베이스캠프(Base camp)'라는 표현으로도 설명된다. 이를테면 등산에 비유해보면,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일시적 거점이 베이스캠프다. 등반대원들은 그곳에서 훈련하고, 물자를 보충하고,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중심 기지'가 되어야 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영적·실질적 훈련을 받고 힘을 보충한 뒤 흩어져야 한다.

20세기 중엽 이후로 세계 교회는 제1차·2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엄청난 인명 피해와 정신적 충격, 그리고 사회 전반에 퍼진 실존주의 사상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계'나 '역사'라는 거대 담론에서 눈을 돌려 '나'라는 개인의 존재와 실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개인 구원과 함께 사회 구원을 동시에 추구한다. 개인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각 영혼이 하나님 앞에 존엄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회와 세계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세속화 신학"이 주장했던 핵심 중 하나다. 개인의 죄 사함에만 머무르지 말고, 세상과 역사의 구원까지도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선교와 교회의 사명이 바로 여기 있다고 역설한다.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어 고립되어서는 안 되며, 교회 담장 밖으로 나가 '울며 씨를 뿌리는' 선교적 실천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보내는 단체'로 인식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선교단체"라고 하면, 교회와 분리된 특정 조직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사실 교회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선교단체다. 교회가 잘 모여서 예배와 교육을 받고, 잘 흩어져서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 그곳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실현된다.

또한 교회는 선교적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해 'OC(Olivet Center)' 같은 베이스캠프를 만들어 왔다고 장재형목사는 언급한다. OC는 선교 및 제자훈련의 중심지로, 영적 재충전과 교육, 그리고 전략적 기획이 함께 이루어지는 곳이다. 시편 133편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훈련받으면, 하나님께서 거기서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신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을 드려 엘리야를 섬겼을 때 기름과 밀가루가 끊이지 않았듯, 교회가 자신이 가진 자원을 선교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으면 하나님이 더 풍성히 채워주신다고 강조한다.

이는 바울이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누군가는 가서, 누군가는 전해야 한다. 교회가 앉은 자리에서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만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법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의 대조 역시, 우리가 무엇을 뿌리고 거두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육체의 일은 음행, 더러운 것, 우상 숭배, 시기, 분쟁 등으로 나타나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아름다운 특성을 지닌다. 교회가 뿌려야 할 씨는 바로 이 성령의 열매를 낳게 하는 복음적 씨앗이다.

장재형목사는 구체적으로, 전도가 먼저 "개인 전도"에서 시작된다고 역설한다. 예수님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하셨을 때,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주변, 가정, 친구, 직장 동료 같은 사람들이다. 전도의 쉬운 실천 방법 중 하나는 "당신,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될 수 있다. 낯설지만, 이렇게 간단한 대화의 시도 속에서 놀라운 열매가 맺힐 수도 있다. 간혹 상대가 거절하거나 무례하게 반응할 수 있지만, 농부가 모든 씨를 한 자리에만 뿌리지 않고 다양한 밭에 뿌려보는 것처럼, 우리도 다양한 사람에게 복음의 씨앗을 전달해야 한다.

이뿐 아니라, 이미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도 복음을 깊이 알지 못하거나, 성령 체험이 없는 경우가 많다.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세상 가치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들 역시 많은 것이다. 때문에 교회는 "더욱 깊은 복음, 이면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구원을 받고, 성령에 충만해져서, 진정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는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온전한 신앙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신학적 사실과도 맞닿아 있다.

계시록 3장 20절의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마음의 문을 열 때 주님이 들어오신다. 이때 성령이 임재하면,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시편 126편 5~6절에서 말하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열매가 바로 이러한 '변화된 영혼'들을 통해 구체화된다고 가르친다. 개인이 중생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선교의 사명을 이어받아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순환이 일어날 때, 한 가정, 한 공동체, 한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

특히, 가정이 복음화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Family Church"라고도 부르며, 작은 교회가 바로 가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가정이 복음 안에서 바로 서면, 그 자녀와 후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이는 곧 선교의 지속적 동력이 되며, 세대에서 세대로 복음이 계승되는 아름다운 통로가 된다. 농부가 오랜 기간 정성을 다해 씨를 뿌린 뒤에야 풍성한 열매를 거두듯, 한 가정이 복음으로 결실을 맺는 데는 끈질긴 기도와 눈물의 헌신이 요구되지만, 결국 "울며 씨를 뿌린 자가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되리라"는 약속이 성취된다.

장재형목사는 구체적인 선교 전략을 꿈꾸며, "미국 50개 주에 각 지역 교회를 세우고, 그들이 다시 세계의 가난한 나라에 복음의 센터를 세워주면, 백 개국, 천 개국 전도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자원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해 "사르밧 과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세상 방식대로 하면, 가진 것이 넉넉해야 나눌 수 있지만, 복음적 관점에서는 '가장 부족할 때 드리는 헌신'이 하나님 앞에서 풍성함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이런 영적 원리를 따라 헌신하는 이들이 모일 때, 소위 '거대한 선교 운동'이 점차 구체화되고 확산될 수 있다.

결국 선교는 '집단적·조직적 전술'뿐 아니라, 개인과 가정의 작은 헌신이 모여 이뤄지는 종합적 사역이다.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지금, 교회는 과거처럼 교회 건물 안에만 모여 있기를 고집할 수 없다. 끊임없이 세상으로 나가 "울며 씨를 뿌리는" 사역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씨를 뿌리는 자들에게 시편 126편은 분명한 약속을 준다.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 약속을 붙드는 것이, 바로 장재형목사가 시편 126편을 통해 강조하는 핵심 중 하나다. 구원의 감격에서 시작된 찬양, 그리고 그 찬양이 이끄는 선교적 실천은 언제나 거룩한 눈물과 헌신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 끝에 있는 것은 빈손이 아니라, 풍성한 영적 곡식 단이다. 다시 말해, 교회는 눈물과 땀을 흘려 씨를 뿌려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고, 하나님은 그 헌신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뿌리지 않고 거두려 하면 그저 망상에 불과하다. 쉽게 전도하고 선교하는 길은 없으며, 고통과 어려움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그러나 한번 씨를 뿌린 자들은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보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시편 126편의 메시지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과도 일치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는 명령 안에는 이미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헌신을 요구하는 무게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길이 결코 절망이나 낙심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성경은 확언한다. 오히려 "생명 얻은 자"들이 다시 다른 이에게 생명의 씨를 전하며, 그들이 또다시 복음의 전달자가 되는 놀라운 '생명의 연쇄 반응'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듯, 한 번 불붙은 복음은 주변 사람에게 옮아가서 또 다른 교회를 탄생시키고, 또 다른 선교지를 개척하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모습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설파한다.

시편 126편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큰 주제를 명확히 볼 수 있다. 첫째, 포로 상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온 "구원의 감격"이 얼마나 놀랍고 기쁨에 찬 것인지, 그리고 그 기쁨이 자연스럽게 찬양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구원의 기쁨을 체험한 자들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세로 세상에 복음을 뿌려야 한다는 '선교적 사명'이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구원의 감격이 참된 찬양으로 이어질 때, 그 찬양은 다시 선교적 열정을 깨우고, 그 열정은 더 많은 영혼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교회를 이끈다.

장재형목사는 시편 126편이 바로 이러한 '구원의 기쁨과 선교의 헌신'을 통합적으로 보여주는 탁월한 본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시편을 읽을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난 것은 결코 그들의 힘이나 지혜 때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와 때가 차서 이루어진 역사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해방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때문이다. 그 은혜를 먼저 입은 자들은 그 감격을 찬양으로 노래하고, 동시에 기꺼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헌신한 뒤에는 언젠가 "기쁨으로 곡식 단을 거두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면, 교회 각 성도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선교적 비전을 품고 씨를 뿌려야 한다. 개인 전도든, 해외 선교든, 지역 봉사든, 혹은 가정 복음화든, 그 형태는 다를 수 있지만 본질은 같다. "눈물의 씨 뿌림"이 없다면, "기쁨의 수확"도 있을 수 없다. 이 원리는 경제 원리나 조직 관리 방식으로 대체될 수 없는, 성경이 제시하는 영적 법칙이다. 그리고 이 법칙을 붙드는 교회가 바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적극 순종하는 교회가 된다.

시편 126편에서 시편 기자가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인간의 모든 상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때 감격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그 감격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선교적 헌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되 흩어지며, 흩어지되 다시 모여서 재충전과 훈련을 받음으로써 더욱 크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이를 위해 교회마다, 가정마다, 그리고 개인의 삶마다 부어지는 은혜가 날마다 이어지기를 소망하게 된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라는 간구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기도다. 삶의 여러 가지 포로 상태에 놓인 이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해방을 구하고, 구원이 임한 뒤에는 찬양과 선교적 헌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길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시편 126편이 보여준 역사는 분명하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들이 때가 차면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원의 감격"과 "선교의 사명"을 함께 붙드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며, 이 땅의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진정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와 같은 메시지를 통해, 교회는 명백히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세워진 '선교 공동체'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그 감격을 시편 126편으로 찬양했듯, 오늘을 사는 우리도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찬양과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쁨의 결과물로서, 세상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선교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현장에서 언젠가 만나게 될 기쁨의 단 수확을 바라보며, 이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 바로 교회와 성도의 본질적인 소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