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제자들의 태도
장재형 목사는 복음서의 핵심 메시지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깊은 세계를 아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놀랍고도 심오한지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던 제자들의 태도는, 인간이 '정의롭다' 혹은 '옳다'고 생각하는 시각이 때로는 참된 사랑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을 드러낸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죄 많고 미천한 존재로 묘사되어 왔다. 누가복음 7장 37절에서는 이 여인을 죄인으로 표현하는데, 그 죄 많은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 26장 6-7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식사하시는 주님의 머리에 부었다. 이를 본 제자들이 크게 분노했다. 이는 요한복음 12장 6절을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중에서도 가룟 유다가 "무슨 의도로 이런 허비를 하는가. 이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항의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제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가르치셨던 '사랑의 본질'을 아직 깊이 깨닫지 못한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아무리 '옳아 보이는' 정의나 주장일지라도, 사랑의 깊은 세계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심각한 결핍이 생긴다. 마태복음 26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반응은 바로 그 결핍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실제로 '낭비 같다', '허비다'라고 보는 시각은 인간적으로는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주님께서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이 여인의 행위를 높이 평가하셨다는 데에서, 우리는 '거룩한 낭비'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세상적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논리적이지 않아 보이기도 하는 그 한없는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가 자주 인용하는 예화 중 하나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조건 없이 받아주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주며 잔치를 베풀었다. 이것은 주변 사람들 시각에서 보면 불공평하고 낭비 같은 행위이지만, 사랑 안에서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어진다. 그 사랑에는 오직 "내 아들이 돌아왔다"라는 기쁨이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 사랑의 어리석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계산법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마태복음 26장 8절에서 제자들이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라고 외쳤을 때, 그 표면적 언어만 놓고 보면 '가난한 자를 돌보려는 의로움'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복음 12장 6절은 가룟 유다가 사실 돈궤를 맡고 있었고 거기에 손을 대기도 했음을 언급한다. 이는 당시 이 말의 근본 동기가 온전한 '이웃 사랑'이나 '가난한 자를 향한 연민'이 아니었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제자들은, 특히 가룟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의 행위를 진심으로 이해하기보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이 비싼 향유를 어찌 함부로 사용하느냐"고 비난했던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우리 역시 삶 속에서 '거룩한 낭비'를 주님 앞에 드릴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때로는 우리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희생이나 헌신만 요구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허비 같고 어리석은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있다.
가룟 유다도 분명 그리스도의 사랑을 크게 누렸던 제자 중 하나였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께서 유다를 택하셨을 때부터 그에게 배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셨을 리 없다. 오히려 그를 끝까지 믿으셨고, 돈궤를 맡길 만큼 신뢰하셨다"고 말한다. 만일 누군가를 '반드시 배신할 사람'이라고 지레 짐작했다면, 돈이라는 중요한 부분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주님이 베푸시는 무조건적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비극이 생겨난다.
어찌 보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는 '이제 그만 예수를 그들의 손에 넘겨주고, 자신은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자'는 식의 계산된 판단이 작동했을 수 있다. 마리아의 옥합 사건을 비롯해, 주님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허비' 같고 '비효율적'으로 보였던 가룟 유다는, 끝내 예수를 은 삼십에 팔기로 결정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바로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의 비극적 결과"라고 지적한다.
마가복음 14장 9절에서 예수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사랑의 허비야말로 영원히 기억될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만약 '객관적 효율'을 기준 삼아 판단했다면, 향유를 팔아 여러 이에게 나눠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보신 것은 '사랑의 동기'와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받으신다. 그리고 그 마음이 온전한 헌신과 사랑일 때, 그 일은 결코 낭비가 되지 않는다"고 설파한다.
이처럼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땅끝까지 전해질 복음 이야기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었다. 그녀의 이름이 성경 본문에 분명히 언급되진 않았으나, 그 헌신적 사랑은 2000년 이상 교회 역사 속에서 회자되고 있다. 반면, 이 모습을 '허비'라고 말했던 유다는 배반자의 상징이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사랑은 한없이 크지만, 그 사랑을 오해하고 배척하면 결국 파멸의 길로 치달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보여 준 사랑의 모습은 십자가 사랑으로 집약된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것은 인간 논리로 측량할 수 없는 완전한 어리석음의 사랑"이라며, 이를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달라지지만, 거부하면 유다처럼 결국 후회와 비극으로 끝날 수 있다는 점을 늘 상기해야 한다고 한다. 예수님의 깊은 사랑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왜 이런 낭비를 하느냐'는 비판적 시각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그 사랑에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말하는 '사랑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은 이유가 사라지는 세계로 이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베푸는 모든 희생이 '이유 없이' 가능하듯, 진정한 사랑의 세계는 계산이나 합리적 조건을 뛰어넘는다. 이것이 참으로 깊은 세계이며,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보여 주는 본질이다. 그녀의 헌신은 세상적 논리로 보면 허비였으나, 하늘의 눈으로 보면 영원히 기억될 복된 낭비였다.
이 장면에서, 장재형 목사가 계속 강조하듯 "무엇을 위해 사는가, 누구를 위해 헌신하는가"가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 합당하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세속적 판단과 계산을 내려놓아야 한다. 헌신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고, 헌신으로 무엇을 더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님의 사랑에 눌려 그 사랑을 돌려 드리는 마음, 이것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마음이자 모든 성도가 간직해야 할 태도라는 것이다.
여인의 희생적 헌신 뒤에는, 자신을 구원해 주신 주님에 대한 깊은 감사와 영혼의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깨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자기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기초"라고 장재형 목사는 말한다. 주님의 머리에 부어진 향유는 곧 주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의 표현이었다. 계산과 조건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렇듯 '사랑의 깊은 세계'가 열렸음에도, 같은 자리에 있던 제자들 중 일부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유다는 분노했고, 그 분노가 결국 배반으로 이어진다.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의 심령 안에서 '이제 주님을 팔아넘겨야겠다'라는 끔찍한 선택이 꿈틀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타락과 배반이, 반드시 무서운 악의를 가진 사람만이 일으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누렸던 자가, 그 사랑을 왜곡하고 판단하다가 배신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사랑을 깨달은 자'의 대표로, 유다는 '사랑을 깨닫지 못한 자'의 대표로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이 대비 속에서, 장재형 목사는 우리에게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세상의 논리와 자기 의로움에 붙들려 주님의 사랑을 허비처럼 여기며 결국 배신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아무리 어리석어 보여도 전부를 내어드리는 헌신으로 하늘의 기쁨을 누릴 것인가. 이것은 2000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진 물음이다.
이같이 옥합 사건은 배반을 향해 가던 유다의 마음 상태와 더불어, 제자들 전체가 가지고 있던 미숙함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다. 이는 곧 주님의 고난 역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려 주기도 한다. 장재형 목사는 늘 "고난은 배반에서부터, 사랑을 불신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에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요 13:34)이며,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장재형 목사가 말하는 핵심은 이렇다. 사랑의 깊은 세계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자비를 매일 묵상해야 한다.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당장 낭비로 보이는 것도, 주님의 시선 안에서는 가장 존귀한 헌신이 된다. 그 사랑을 알 때, 우린 더 이상 계산하지 않고, 이유 없이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드리게 된다. 이는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서로에게 그 사랑을 베풀어야 체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 중에서도 결국 유다처럼 배반의 길을 갈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왜 저렇게 허비를 하나, 저렇게 하면 아무 이득도 없이 낭비만 되는 것 아닌가?"라고 하다 보면, 사랑은 서서히 식어 간다. 나아가 심령 안에 배반의 싹이 돋아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점점 줄어들고, 세상적 유익과 합리만을 쫓는 판단이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바로 유다가 걸어간 길이었으며,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리고 그 옆에서 '이것을 허비라'고 외친 제자들의 시각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다시 돌아볼 수 있다. 이 간극은 곧 '사랑을 통한 거룩한 낭비'와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접근 사이의 충돌'이며, 우리는 여인 편에 설 것인지, 유다의 편에 설 것인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 사랑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례"라고 이 본문을 소개한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의 중심에서, 주님의 고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2.유다의 배반과 그리스도의 용서
장재형 목사는 마태복음 26장 14절 이하를 통해, 본격적인 주님의 고난 이야기가 '열둘 중 하나인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사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유다가 직접 찾아가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사건은 실제로 급박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은 삼십에 주님이 팔려나가는 것은, 인간의 시선에서 보면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은 삼십이라는 금액을 두고 "요셉이 형들에게 은 이십에 팔렸던 이야기(창 37:28)를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노예를 사거나 팔 때 쓰이던 대표적인 화폐 기준이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노예처럼 팔려나간다는 사실이 극도의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유다는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라고 물었고, 대제사장들은 은 삼십을 달아주었다(마 26:15).
왜 유다가 배반했을까? 장재형 목사는 "유다가 확고한 신념으로 배반을 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단순히 돈 몇 푼을 더 벌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보가 너무나 '현실성이 없고, 오히려 허비처럼 느껴지는 사랑'만을 강조한다고 여겼을 수 있다. 특히 옥합 사건을 통해 유다는 '더 이상 이 사람을 따르는 것은 낭비'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다가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비극이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도 주님께 크게 사랑받은 제자였는데, 스스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사랑을 거부하고 배반의 길을 택했다"라고 한다. 우리 역시 사랑의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했을 때, 때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떠나려는 마음이 들 수 있다. 이 모습이 곧 유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준 후, 예수님은 결박되어 총독 빌라도에게 보내진다(마 27:1-2). 그런데 유다가 나중에 스스로 뉘우쳐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라고 고백하며 은 삼십을 다시 대제사장들에게 돌려주려고 한다(마 27: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냉담하게 응수했고, 유다는 그 은전을 성소에 던져 놓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다(마 27:5).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으로 "유다가 뉘우치긴 했으나, 진정으로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지는 못했다"라는 사실을 든다. 만약 그가 주님의 용서를 믿고 다시 달려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십자가에 달려서조차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셨다. 그렇다면 유다의 배반조차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사랑을 끝까지 믿지 못하면, 결국 회개할 길도 막히게 된다"고 해석한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주님의 사랑이 그것을 뛰어넘는다는 진리를 붙들어야 하는데, 유다는 그 진리를 붙들지 못하고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 그 절망이 생긴 이유는, 처음부터 주님의 사랑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자기 논리와 세상의 시각으로만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여기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단순히 '배반자는 벌을 받는다'라는 결론이 아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며, 동시에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떠날 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곳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 준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하고 죄를 짓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때 돌이켜 주님께 나아가느냐, 아니면 절망하고 스스로 포기하느냐 하는 선택이다.
마태복음 27장 3절을 보면, 유다가 뉘우치고 은 삼십을 도로 가져갔다. 그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괴로워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가 진정한 회개의 자리에 이르지 못했던 이유는, 자신의 죄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분명 회개할 기회가 아직 열려 있었음에도, 자기 생각에 갇혀 주님의 사랑을 다시 붙들지 못한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삶에서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아니면 주님을 멀리 떠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베드로 역시 주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그를 회복시키셨다(요 21:15-17).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죄가 더 크고 작음'에 있지 않다. 베드로 또한 심각한 배신이었으나, 그는 주님께로 돌아왔고, 유다는 돌아오지 않았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역사는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주님께 진실하게 돌아오는 이들에게는 새 길이 열렸음을 증언해 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유다의 배반 이야기를 통해 "아, 저 사람 정말 큰 죄인이구나" 하고 단죄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혹시 내 안에도 이와 같은 배반의 마음이 잠재되어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용서를 향해 달려갈 준비를 해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로 가는 길은 유다의 배반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것은 오히려 '죄인들을 향한 한없는 용서'였다. 장재형 목사는 마태복음 27장 이후 전개되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서사를 통해 "인간의 죄가 극에 달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죄보다 훨씬 크다"는 진리를 선포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자 교회의 중심 메시지다.
하지만 세상적 시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여전히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가, 십자가는 너무나 어리석지 않은가'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은 어리석음으로 보이기 마련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큰 어리석음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 어리석은 사랑 때문에, 유다 같은 죄인에게조차 새로운 기회가 열려 있었다.
사단은 욥기 1장에서 욥의 신앙이 '이유가 있어서' 라고 참소했다. 즉 하나님이 욥을 지켜주시니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만약 모든 축복을 거두어 가면 욥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붙드는 자리에 선다면, 사단이 어떤 방식으로 참소하거나 유혹한다 해도, 결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에 이유가 사라지는 경지에 이르라"고 자주 권면한다. 어떠한 상황에서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복' 혹은 '형통'이나 '기적'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절대로 떠나지 않을 수 있다. 유다는 스스로 이유를 붙들고 판단했다. '이분의 사랑이 정말 하나님의 길인가? 너무 허비 같고 비효율적이잖아.' 하고 결론지었다. 그 계산의 끝은 배반이었다.
우리는 같은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주님의 사랑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어도, 그 사랑을 의심하기보다는 붙들고, 그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 때, 베드로는 그 행위를 납득하지 못했다(요 13:6-8). 그러나 주님은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깨달으리라"고 하셨다. 즉 신앙의 여정에는 이해되지 않는 구간이 있지만, 그것을 넘어섰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높고 깊은지 알게 된다.
유다가 자살하기 전, 그는 뒤늦게나마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마 27:4)고 고백했다. 이것은 적어도 자기행위가 죄임을 시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회개를 선택하기보다, 절망을 선택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설령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다시 돌아가 엎드려 용서를 구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그 사실을 끝까지 믿지 못하면, 죄는 끝내 우리를 파멸로 몰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반 이야기는 구원 역사의 핵심인 십자가와 함께, 인간에게 부여된 '선택'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사랑도 이미 베풀어졌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믿고 수용하느냐, 아니면 배척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극명하게 갈린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의 최후는 우리에게 큰 교훈이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의 용서 앞에서 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 배반과 용서의 대조를 통해, 장재형 목사는 교회 공동체가 반드시 잡아야 할 기둥이 '용서'임을 역설한다. 주님은 가장 큰 배신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베풀 준비가 되어 계신다.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며, 믿음의 공동체에서 무조건적 사랑을 실행해야 한다. 그래야 사단이 파고들 틈이 없고, 유다처럼 절망의 끝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마태복음 26-27장에서 유다의 배반으로 시작된 고난의 서사는 십자가에서 완성되는 주님의 희생과 용서를 통해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주셨고, 그 사랑이 어떤 죄라도 덮을 수 있지만, 우리의 불신앙과 자기중심이 그 길을 막을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배반의 길을 택한 유다는 우리 모두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인물이다. 사도들은 초대교회에서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세웠고(행 1:26), 유다는 그토록 오랫동안 주님 곁에서 말씀과 사랑을 배웠음에도,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도 '제자'라 불릴 수 있으나,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면 언제든 유다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처럼 소주제 2에서는 유다가 왜 배반했는지, 그리고 그 후회가 왜 진정한 회개로 이어지지 못했는지를 깊이 살폈다. 그 결론은 '사랑을 신뢰하지 못함'이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주님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사람은 자기 생각과 논리에 빠져, 배반과 절망의 길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항상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는 약속이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배반이 파멸로 가는 길임을 보았다면, 이제는 그리스도께 되돌아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사랑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느냐, 아니면 사랑을 불신하고 절망과 배반의 길을 택하느냐. 그것은 우리의 몫이다.
결국 유다는 '배반의 상징'으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헌신의 상징'으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오늘 우리에게 각기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 이 대조 속에서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주님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낭비 같고 어리석어 보여도, 그것이 사랑의 길이고 구원의 길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길에 들어설 때, 비로소 진정한 제자의 삶이 시작된다.
또한 우리는 유다를 비난하는 선에서 그치지 말고, 혹시 내 안에 자리 잡은 '계산적 사고'와 '자기중심적 시각'이 주님의 사랑을 판단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배반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인 불신과 오해, 그리고 세속적 생각이 폭발하면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은 불신의 씨앗도 방치하지 말고, 곧바로 회개하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태복음 26-27장의 이야기는 이렇게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과 유다의 배반을 함께 보여 준다. 전자는 '주님을 향한 순전한 헌신', 후자는 '주님을 향한 불신과 세상적 판단'의 극단적 결과다. 장재형 목사는 "그 중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우리는 날마다 결정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과거 한때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주님을 선택하고 따르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가 지속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무조건적 은혜'로 다가오며, 그 깊이를 인간의 이해로 완전히 측량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거룩한 낭비'로 봐야 할 만큼 커다란 선물로 여겨야 한다. 둘째, 그 사랑을 믿고 붙드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불신과 판단으로 배반의 길을 갈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유다의 대조는, 사랑을 선택한 자와 거부한 자의 운명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극명히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도 늘 이 두 갈림길이 공존한다.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때로는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내어놓음으로써 어리석어 보이는 길을 가겠는가? 아니면 효율성과 합리성을 내세워 주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계산하다가, 끝내 떠나는 길을 선택하겠는가?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질문이 마태복음 26-27장을 통해 우리에게 날마다 던져지고 있다"고 역설한다.
주님의 고난은 사랑을 거부하는 인류의 배반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고난을 통한 십자가의 승리는 배반조차도 용서로 감싸 안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다. 장재형 목사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 같은 마음으로, 나아가 십자가 앞에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살 때, 우리 역시 이 구원의 능력에 동참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반면, 유다처럼 세속적 가치관에 묶여 배반으로 치닫는다면, 그 끝에는 끝없는 절망뿐임을 경고한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고난과 배반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승리'다. 유다의 배반을 통해 고난이 시작되었지만, 그 고난은 십자가 위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의 절정'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하며, 옥합을 깬 여인의 사랑을 떠올려야 하고, 동시에 유다가 간 길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오늘날 우리도 참된 평안과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유다와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는 신앙의 양극단을 보여 준다. 하나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주님께 드린 헌신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적 계산으로 주님을 배반한 죄악이다. 우리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합적으로 보면서, 날마다 주님께 돌아가 내 삶 전체를 드릴 것인가, 아니면 결국 주님을 떠나 절망으로 내몰릴 것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십자가의 길은 좁고 험할 수 있지만, 그 길의 끝은 영원한 생명과 기쁨이 기다린다."
이 모든 것은 단지 20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말씀이다. 배반의 길로 시작된 고난도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으로 인해 '은혜의 역사'로 바뀌었다는 점을 기억하며, 매일 주님을 선택하고 주님의 사랑 속에 머무르기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유혹에 눈이 멀어 사랑을 포기할 것인지를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결단은 나의 몫이며,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셨다. 그러므로 믿음을 버리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돌아가 그 용서와 사랑을 누리라"고 권면한다.
이처럼 마태복음 26-27장, 곧 유다의 배반 이야기는 고난과 배반, 그리고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용서를 함께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세상의 눈에 허비처럼 보이나, 그 안에야말로 참된 생명이 있다"라고 힘주어 설파한다. 그리고 그 길의 반대편에는 사랑을 믿지 못하고 배반하여 절망으로 가는 길이 있음을 늘 강조한다. 우리의 선택은 분명하다. 사랑의 길을 걸을 것인가, 배반의 길을 걸을 것인가. 마태복음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유다의 대비, 그리고 고난 중에도 변함없이 베풀어지는 주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이 두 갈래 길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신앙과 유다의 배반을 한데 묶어 고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인간에게는 항상 선택이 따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유 없는 헌신으로 응답할 때 우리 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세속적 사고로 사랑을 재단하고 거부하면 언젠가 유다처럼 돌이킬 수 없는 배반의 길에 서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여전히 주님의 용서가 열려 있지만, 우리가 믿고 돌아서지 않으면 그 또한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한 인간이 배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다. 배반이 있을지라도 그 사랑을 통해 구원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 복음의 진수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복음이 우리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다"고 한다. 단, 주님의 사랑이 때로는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절대 그것을 허비라 여기지 말고 나를 향한,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믿고 수용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옥합을 깬 여인처럼 복된 자리에 서게 된다.
이처럼 두 소주제에 걸쳐 마태복음 26-27장에 나타난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유다의 배반 이야기를 살펴보면,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회개할 길이 열려 있는데도 불신으로 나아가 그 길을 스스로 닫아버릴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무조건적인 헌신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답은 오직 우리 각 사람의 몫이다. 십자가 앞에 모두가 평등하며, 사랑 앞에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같은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유다의 배반을 재현할 것인지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가 결정한다.
마지막으로 장재형 목사가 던지는 권면은 "회개하라, 그리고 돌아오라"는 주님의 초대에 귀 기울이라는 것이다. 성소에 돈을 던져놓고 자살의 길로 간 유다처럼 스스로 단절시키지 말고, 아무리 죄가 크고 고난이 깊어도 주님께로 돌아가 그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다. 거기서 주님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신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고, 십자가의 길이며,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헌신이 보여 준 생명의 세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