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베드로와 유다의 대조: 중생 체험의 필요성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와 유다가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둘 다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였고, 주님의 행적과 기적, 가르침을 늘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한 사람은 주님을 배반했음에도 회개하여 돌아와 새로운 길을 걸었고, 다른 한 사람은 결국 회개 대신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대비는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도전과 교훈을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조적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던진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두 인물이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최종적으로 한 사람은 회개하고 돌아왔고, 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극과 극의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결정적 요인은 바로 중생 체험, 곧 '목욕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라는 관점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는 처음에 이를 극도로 거부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제자의 발을 씻길 수 있는가? 감히 제자인 내가 주님의 수고를 받을 수 없다"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러면 내 발뿐만 아니라 머리와 온몸도 씻겨주십시오"라고 태도를 바꿨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이미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과 진리의 말씀, 주님의 사랑으로 '근본적인 씻음'을 받은 자임을 나타냅니다. 즉, 근본적인 구원의 체험, 곧 중생의 체험이 베드로 안에 이미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설령 그가 연약함으로 인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만큼 큰 죄악을 범했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죄를 지었을 때 돌이켜 회개하는 태도"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중생의 확신이 있을 때,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죄악을 범했어도 참회하고 주님 품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반면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다'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도 비극적인 배신의 장면을 남깁니다. 성경을 보면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로 주님을 배반했는데(세 번 부인), 그가 다시 돌아온 반면 유다는 자신의 배신을 만회하지 못하고 자살에 이릅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는가? 유다에게는 진정한 중생 체험이 없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지적됩니다. 실제로 그는 예수님이 펼쳐 보여주신 치유와 기적, 말씀,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성품을 늘 옆에서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진심으로 자신의 영혼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드리워진 자기중심적 욕망, 돈과 권력에 대한 갈망, 혹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만 바라보려는 왜곡된 시선이 그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죄를 범한 뒤에도 참된 회개로 돌아서기보다는 절망과 자기포기로 내달린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매우 안타깝게 지적합니다. "예수님 곁에 있었다고 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참된 구원은 결국 주님의 사랑을 내 영혼 깊이 받아들여, 내가 죽고 다시 사는 중생의 체험으로 나아가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유다는 그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었고, 결국 무서운 영적 파멸에 이를 뿐이었습니다.
이렇듯 두 사람은 똑같이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최종적으로 한 사람은 놀라운 회개의 역사를 통하여 주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남은 생애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로 살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자신조차 용서할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결국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중생 체험이 있느냐 없느냐, 다시 말해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새로워졌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귀결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의 삶을 통해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본래 연약하기에, 심지어는 수제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베드로조차도 주님을 부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목욕한 자', 곧 중생을 통해 근본적 씻음을 받은 자는 그 죄로부터 다시 돌아올 길이 열려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은 그 길을 언제나 열어놓고 계신다는 것, 이것이 베드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희망이다."
또한 로마서 8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주님 안에서 중생한 자들이 가지는 놀라운 신분의 변화, 곧 '나는 이제 죄인으로서의 정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로마서 8장 31-39절에서는 어떠한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베드로 스스로는 주님 앞에 나아갈 낯이 없었지만, 주님은 부활 후에 직접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며 그의 사랑 고백을 이끌어내셨다. 이처럼 주님은 끝까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붙드신다. 우리가 비록 넘어지고 쓰러져도, 설령 유다처럼 큰 죄를 범했어도, 우리의 중심이 주님께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주님은 용납해주시는 분이시다"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지은 죄와 실패가 너무 커서 주님께서 다시는 받아주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고, 결국은 회개의 길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는 사단의 가장 큰 속임수 중 하나입니다. 사단은 늘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넌 이미 끝났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라고 참소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안에서 다시 그 사랑을 붙들었고, 유다는 스스로 그 길을 차단했습니다. 이 차이가 결국 영원한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중생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지도자로서 종교적 배경이 탄탄했고, 성경 지식이나 율법에 대한 지식도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니고데모는 영문을 알지 못해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늙으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재탄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 즉 죄에서 떠나 깨끗해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는 '영적 재탄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사건과 맞물려 생각해보면, 물로 씻어져야 함은 죄에 대한 철저한 심판과 돌이킴을 의미하고, 동시에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리가 살아 움직이는 삶, 곧 우리 안에 사랑이 충만하게 되는 삶을 뜻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죄로 오염된 영혼이 진리의 영,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죽어야 다시 산다'는 원리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고, 죽음 없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시면서도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빌립보서 2장 5-8절). 그리고 그 결과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죽음을 통과하심으로써 부활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우리가 중생 체험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내 자아가 철저히 죽어야 한다'는 원리를 시사합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초대 교회의 수많은 신앙인들도 이러한 과정을 통과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의(義)와 열심, 자기 확신으로 가득했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처럼 이전의 '나'가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실제적인 체험이 있어야 진정한 중생이 가능해진다"고 역설합니다.
유다는 이 죽음의 과정을 끝까지 거부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3년 이상이나 가까이서 따르며, 기적과 가르침을 직접 접했으나, 자신 안에 있는 욕심과 이기심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왜 이 귀한 향유를 낭비하느냐,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지 않느냐'(요 12장 참조)라는 말을 하며 겉으로는 선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돈궤를 맡고 있었던 그는 거기서 이익을 취하는 탐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행위 자체가 그가 어디까지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의 죄책감과 절망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최악의 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베드로처럼 중생의 체험이 있느냐, 혹은 유다처럼 머리로는 예수를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전혀 자기 내면에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이냐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심지어 교회 내에서 여러 직분을 맡았어도 중생 체험이 분명치 않아 늘 흔들리는 사람들을 보며 "겉으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예수님과 전혀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지었을 때 즉시 주님께 돌아가 회개하고 용서받기보다는, 스스로 낙심하거나 혹은 외식을 통해 죄를 덮으려 하다가 더 깊은 영적 수렁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중생 체험이 있어야 하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실제로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자칫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사랑을 정말 온 존재로 체험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울며 통곡하며 회개했을 때, 그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았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자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 사실이 그를 다시 일어서게 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도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은 '주님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유다는 이 사랑을 믿지 못했고, 자기 죄의 무게에 짓눌려 회개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차이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해도, 주님의 사랑을 믿고 그 품으로 달려나갈 용기가 없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유다와 같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반면 진정한 중생으로 인해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설령 죄를 범했을지라도, 늘 새롭게 회개하고 '발을 씻는' 과정을 통해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죄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죄를 지은 뒤에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관건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설령 믿음이 좋다고 소문난 자라도 넘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넘어졌을 때 그 상태에서 머무르느냐, 아니면 다시 돌이켜서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삶을 새롭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라는 점을 거듭 강조합니다. 이처럼 베드로와 유다의 대조는 우리에게 중생 체험이 얼마나 결정적인가를 보여줍니다. 이미 목욕한 자, 곧 주님의 보혈과 사랑으로 근본적 씻음을 받은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죄를 범했을 때 빨리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직 목욕하지 않은' 자, 즉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내가 내려놓이지 않은 상태에 머무르는 사람은 죄가 닥쳤을 때 자포자기하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갈 위험이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진정으로 주님을 만났는가? 주님의 사랑이 내 영혼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내가 죽고, 예수님으로 다시 사는 체험이 있는가?" 이것이 없다면,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어도, 어느 순간 유다와 같은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예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어떤 죄라도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베드로와 유다의 대조'가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는, 겉으로의 신앙 행위가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서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중생 체험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적 분기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중생 체험이 있을 때, 우리는 죄를 범해도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갈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만약 그 중생 체험이 없다면, 결국 유다와 같이 절망의 길로 치달을 가능성이 큽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중생 체험의 여부가 신앙의 생사를 가른다"고까지 말합니다. 이처럼 베드로와 유다가 보여주는 극명한 대비는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적용됩니다. 아무리 교회와 가까이 있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들어도, 결코 중생 체험 없이 형식적 신앙에 머무르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내 사랑'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어떤 죄의 사슬도 끊을 수 있고, 어떤 배신의 상처도 회개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2. 중생의 실제앞서 언급했듯이,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는 중생의 필요성과 그 실체에 대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모두가 필요함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물세례는 죄를 심판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를 끊기로 결단하는 인간의 회개를 상징하며, 성령세례는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실제로 역사하여 마음과 생각까지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중생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해지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라고 가르칩니다.
구약시대부터 물은 정결과 심판을 함께 상징했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 시대의 홍수는 인류의 죄를 심판하는 수단이자 동시에 의로운 노아의 가족을 새롭게 세우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출애굽기의 홍해 사건 또한, 애굽의 군대는 물속에 수장당함으로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물길을 지나 새 자유의 땅으로 향해 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세례 요한이 백성들에게 물세례를 베풀 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라고 외치며 "장차 오실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예언함으로 이어집니다(마태복음 3장). 이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씻기실 것이며, 또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것이라는 예표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진정한 회개와 자기 부정"이라고 말합니다. 물세례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제부터는 죄의 길에서 돌아서서 의의 길로 가겠다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반드시 철저한 회개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죄책감에 빠져 우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제 다시는 그 죄의 길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결단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이 물세례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실제로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 2장 38절 참조)"라고 권고했습니다. 즉, 물세례(죄 사함)와 성령의 선물(성령세례)은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이뤄지는 근본적 변화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며(요한복음 14장, 16장 참조),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이 재현되도록 도우십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주님의 사랑이 실제로 내 안에 부어져서, 내가 예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체험'이라고 설명합니다. 중생을 단순히 "아, 나는 예수를 구주로 믿으니 구원받았다"라고 머릿속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죄를 멀리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르는 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실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왜 이 중생의 역사가 희미한 상태에서 머무르는가? 장재형목사는 그 이유를 '반쪽짜리 회개' 혹은 '반쪽짜리 복음 이해'에서 찾습니다. 어떤 이들은 죄를 지은 후에 잠깐 울거나 마음의 찔림을 느끼고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이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며, 성령의 능력을 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물세례가 죄 사함에 대한 결단을 의미한다면, 성령세례는 그 결단을 실제로 이뤄낼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중생의 완전한 과정을 위해서는 철저한 회개와 더불어 성령을 사모하며, 나 자신의 고집과 교만을 내려놓고 "주님, 저는 이 죄를 끊어낼 힘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제 안에 역사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시고, 새로운 열망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마음을 부어주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전에 사랑하지 못하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용서할 수 없던 상황을 용서하게 되며, 거짓된 말과 행동들을 버리게 되는 실제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사랑이 진리의 핵심이며,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핵심 열매"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모든 계명을 사랑으로 요약하셨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결국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이는 인간적인 사랑, 즉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을 뛰어넘어,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순교의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었고, 그 사랑이 자신의 온 존재를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이 사랑을 영접하지 못하고, 자기 죄의 무게로 인해 스스로를 단죄해버렸습니다.
중생은 한 번의 체험으로 평생 자동적으로 유지되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죄와 싸우고 회개하며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더욱 깊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하며, "우리는 중생 이후에도 여전히 죄에 넘어질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사단의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중생 체험을 통해 근본적으로 '나는 이제 주님의 사람이고,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정체성이 분명해지면, 죄를 범했을 때 예전처럼 그대로 주저앉아 절망하지 않는다. 즉시 회개하고 돌아서서, '발을 씻는' 과정을 통해 관계 회복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도 요한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장 9절)"라고 말합니다. 이는 중생한 자의 삶 속에서도 회개와 용서의 역사가 계속됨을 나타냅니다. 한 번 목욕(근본적 씻음)을 한 자라면, 그 이후에 길을 걸어가며 발에 묻는 먼지는 씻으면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역동적 관계를 시사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계속해서 삶 가운데서 죄로 더러워진 부분을 씻어야 하는 것이고, 그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끝까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신뢰하며 그분께 돌아오는 자세입니다. 베드로처럼 큰 죄를 짓더라도, 주님의 마음을 알고 중생의 실제를 누리고 있는 자들은 결국 참회와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유다와 같은 길은 "내가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주님께서 절대 날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라고 판단하고 돌아오지 못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한계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 5장 8절)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신 우리를, 과연 그 어떤 죄가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위로이자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랑을 붙들고 살 수 있을까요? 장재형목사는 '말씀 묵상'과 '기도',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 실천'을 강조합니다. 첫째,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는 늘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크기를 상기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편지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희생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는 것은 중생 이후의 삶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핵심 요소입니다. 둘째, 기도를 통해 우리는 성령과 교통하며, 날마다 우리 안에 있는 옛 자아가 죽고 주님의 성품이 살아나도록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며,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기에, 기도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죄를 이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힘이 생겨납니다. 셋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다른 지체를 사랑하고 섬기는 삶은 중생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입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기도함으로써 복음을 전 세계에 증거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혼자만의 신앙생활에 머무르고, 자기 열심으로만 달려간다면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성장해나가야 합니다.
물론 중생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 연약함과 죄의 본성 때문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중생의 확신은 "이제 나는 더 이상 사단의 포로가 아니며, 주님 안에서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줍니다. 이것이 유다와 베드로의 결정적 차이였습니다. 유다는 회개하여 돌아갈 자신과 용기가 없었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했기에 다시 돌아갔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만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죄를 한 번 크게 범한 뒤에 다시는 못 돌아오고 아예 신앙을 접어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생을 체험하고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확실하게 새겨진 사람은, 비록 큰 죄를 범했을 때에도 무너져서 끝나지 않고 다시 일어섰을 때 훨씬 더 강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 사함의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고, 주님의 인자와 자비를 실제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란 단지 교리적 지식이나 신앙의 형식적인 절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삶 전체를 바꾸는 강력한 변화의 사건입니다. 내가 전에는 미워하고 증오하던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고, 전에는 세상 욕망과 부를 위해 달려가던 것이 더 이상 내 인생의 목표가 되지 않으며, 전에는 이기적으로만 살았던 내 마음에 희생적 사랑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죄를 범했을 때 곧바로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망, 그 길이 언제나 열려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지탱해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중생의 실제를 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죽어지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다시 살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다'는 것이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내려놓기 싫어하고, 무엇이든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십니다. 그 결과 이전에 가졌던 자아중심적 욕심과 죄의 습관들이 서서히 깨어지고, 진리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동시에 중생 이후에도 넘어질 수 있지만, 그때마다 '발만 씻는' 회개의 과정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날마다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유다와 베드로, 더 나아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바울의 극적인 회심 등 모든 사례는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인간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임할 때 우리는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고, 죄 가운데서도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바로 중생의 실제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와 기쁨,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소망을 품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결국 결론은 사랑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보여준 그 사랑이 우리를 회개로 이끌고, 우리를 새롭게 한다. 그 사랑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변화가 시작될 때, 그게 바로 중생"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죄로 얼룩지고 실패와 낙심에 빠져 있을 때도, 주님의 사랑을 부인하지만 않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내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상태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죄와 허물도 수시로 '발을 씻는' 회개를 통해 극복해 가며,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중생의 실제는 요한복음 3장과 여러 성경 구절에서 드러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물세례는 죄에 대한 심판과 깨끗함을 의미하며, 성령세례는 우리 내면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작동할 때, 우리는 비로소 중생의 실제를 누리며,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라 살 수 있는 담대함과 회개 후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유다와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 목욕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참된 중생 체험'이며,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믿음의 여정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대비에서 배우는 교훈, 그리고 요한복음 3장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통해 드러나는 중생 체험의 실제를 종합해보면, 신앙의 본질은 결국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영접했는가, 나를 철저히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 들어선 사람은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주님의 용서를 힘입어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 연약하지만,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은 완전합니다. 그 완전함 안에 거할 때, 우리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롬 8:1),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롬 8:38-39) 위대한 진리를 붙잡게 됩니다. 결국 이것이 바로 베드로와 유다를 갈라놓은 차이점이자,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붙들어야 할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주님의 깊고도 놀라운 사랑 속으로 들어가, 철저히 죽고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역사를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러한 중생 체험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매일의 삶 가운데서도 주님께로 돌이키는 회개와 새출발이 가능하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더라도 유다처럼 영원히 무너지는 길이 아닌, 베드로처럼 다시 일어서는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