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17장을 해설하며, 바울이 유럽 선교를 본격화하면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지닌 핵심 원리를 부각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미 사도행전 16장까지의 전개를 통해 바울이 소아시아 지역을 넘어 유럽 대륙인 '마게도냐'로 건너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서 첫발을 내디딘 빌립보에서는 온갖 환란과 고초를 겪었지만, 바울과 동역자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moving forward)"했다. 이와 같은 장면은, 복음 전파와 선교 사역에 있어서 어떠한 장애물이나 고난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장재형 목사는 빌립보에서의 극심한 고난이 바울에게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핵심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더 깊이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이 '복음의 핵심'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인데,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능숙하게 묶어서 전함으로써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뿐 아니라 헬라인들, 심지어 사회적 지위가 높은 귀부인들에게까지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곧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구속의 의미를 정확히 증언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 핵심이 흔들리면, 다른 모든 지식적·교리적 가르침도 결국 허공에 뜬 말처럼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사도행전 17장 2~3절을 보면, 바울은 세 안식일 동안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구약 성경을 풀어 가르쳤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주목하며, 바울의 선포 내용은 율법과 예언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조리 있게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짧은 시간 내에 핵심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구속의 진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4영리와 같은 간결한 복음 제시 도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바울이 행했던 설교나 강론은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요점 중심'이었고, 그 요점은 어디까지나 "왜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야 했는가"라는 십자가·부활의 필연성에 맞춰져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어서,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을 우선 찾아간 이유를 로마서 9장을 들어 설명한다. 바울은 "나의 동족,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고까지 토로할 정도로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했다. 비록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지만, 바울은 자신의 민족이 지닌 언약, 율법, 예배, 선민적 약속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역사와 전통의 궁극적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바울은 어디를 가든 회당을 찾아가 그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바울 안에 있었던 주님의 마음"으로 해석한다. 즉, "돌에 맞을지라도, 미움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지닌 그들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 목사는 "복음 전파자는 상대방이 나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약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보고 귀히 여기면서 신약과 연결했다. 이 연합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성경 66권 전체가 교회 안에서 동일하게 존중받는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구약 없이 신약만으로 충분하다"는 식의 주장이 등장할 때마다, 바울이 보여준 이 연합적 태도를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약은 구약의 성취이자 완성"이라는 바른 인식이 있어야만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7장 4절에 따르면, 바울의 이 같은 강론으로 인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회심했다. 장재형 목사는 헬라인, 특히 지적인 문화와 철학을 중시하는 그리스 지역의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한 것은, 결국 그들의 지적 갈증을 채우는 '진짜 진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귀부인들, 곧 사회적 지위나 부를 누리는 이들도 영적 갈망을 가지고 있었고, 복음 앞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복음이 단지 서민이나 낮은 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 계층을 아우르는 강력한 능력임이 드러난다고 한다.
특히 장재형 목사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를 잇는 바울의 선교 여정이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초대교회 선교 모델임을 강조한다. 빌립보에서 옥에 갇히고, 태형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 바울과 실라는 161㎞(또는 그 이상의 거리)를 다시 걸어 데살로니가로 이동했으며, 그곳에서도 끊임없이 복음을 전했다. 이처럼 "흩어지는 교회"이자 "전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 아래,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의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도 "안주하지 말고 계속 움직이라"고 권면한다. 이는 한 곳에 고정된 목회·사역 방식을 절대시하는 태도를 넘어서는 것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람과 자원을 재배치하고, 상황에 따라 떠나기도 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재형 목사는 "누가를 비롯한 네 명의 동역자를 바울이 어떻게 활용했는지, 디모데와 실라를 어떻게 재파송하고,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재정 지원을 하며, 가정 교회가 세워졌는지"를 입체적으로 살펴보길 제안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복음이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확장되고, 이미 개척된 교회에는 필요한 때마다 도움을 주는 유기체적 연결이 유지되는 것"이다. 즉, 초대교회는 한 번 전도했다고 그 도시를 완전히 놓아버린 게 아니라, 디모데나 다른 동역자를 보내어 신앙 상태를 점검하고, 목회적 필요를 채워주었다. 이러한 전략 아래에, 바울은 선교지마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3년 정도 머무르면서도 결코 정체되지 않았고, 상황에 따라 떠나야 할 때 과감히 떠나고, 편지를 통해 교회를 돌봤다.
장재형 목사는 이처럼 초대교회가 보여준 "이동성과 연합성"이 현대 교회가 재발견해야 할 선교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말한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며 안정적 기반을 쌓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바울이 걸었던 길처럼 "결실을 보이기 시작하면 곧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곳을 개척하는" 모델이 훨씬 더 다이내믹하다는 것이다. 이때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그곳 교회가 스스로 견뎌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와 재정, 인력 지원을 해주는 네트워크이다. 장재형 목사는 빌립보서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함께 읽어보면, "빌립보 교회가 두 차례나 모금하여 바울을 도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고 말한다. 덕분에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을 병행하며 사역하긴 했지만, 때로는 전도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데살로니가를 비롯한 여러 교회가 더욱 견고해졌다.
이 모든 과정을 종합해 보면, 장재형 목사가 사도행전 17장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바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을 흔들림 없이 전하며, 서로 연합하고 돌보면서, 한 도성에서 다른 도성으로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이다. 그가 볼 때 이것이 초대교회의 선교 모델이었으며, 현대 교회도 이 모델을 회복할 때 더욱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를 사례로 들어볼 때, 두 도시는 바울의 개척으로 인해 세계 복음화 역사에 커다란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갈 수 있고, 사실 따라가야만 한다고 장재형 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17장에 나타난 '데살로니가 전도' 사건을 통해 바울의 선교 철학과 동족 사랑을 분명히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대목에서 가장 강조되는 점은, 바울이 유대인에게 지속적으로 핍박을 받았음에도 "유대인 회당을 먼저 찾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를 알려면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밝혀놓은 고백을 살펴봐야 하는데, 그는 동족을 향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구원받게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사랑이라고 해석한다.
바울 안에 있는 이런 정서는 곧 초대교회가 유대교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고, 오히려 구약의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흐름을 붙잡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만약 바울이 단순히 "나는 이방인의 사도니까 유대인은 이제 상관없다"라고 했다면, 교회는 초창기부터 기둥이 갈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디를 가든 회당을 우선 방문했고, 한 번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동족들을 향해서도 꾸준히 복음을 전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가리켜 "미움으로 대하는 자들을 다시 사랑으로 찾아가는 모습"이라고 부른다. 결국 초대교회는 이 연합의 기초 위에서 신·구약이 연결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는 비전을 실현했다.
사도행전 17장 3절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설교한 내용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성경으로 증명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핵심 메시지가 없으면 복음이라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해를 받으신 것")과 부활("다시 살아나야 할 것"), 이 두 사건이야말로 모든 율법과 예언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들을 회심시킨 비결도, 사실은 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속사를 꿰뚫는 해설을 제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보면, 그곳 교인들 중에는 지적으로 수준이 높은 이들도 적지 않았고, 종말론이나 종교적 관념 등에 대한 논의가 꽤 깊게 펼쳐졌던 흔적이 남아 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실제적 권면까지 했다. 장재형 목사는 당대 헬라 지역의 신분제 사회에선 귀족이 노동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복음 공동체 안에서는 그런 문화가 수정되고, 누구든지 주님을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윤리가 자리 잡았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종말론적 기대감이 앞서 무질서해질 수 있던 교회를 바로잡기 위해, 죽은 자의 부활과 주님의 재림에 대해 데살로니가전후서에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사안들은 바울이 잠시 머물다 떠난 뒤에도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교리와 실천"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처럼 회심 이후에도 교회를 끊임없이 돌보는 바울의 모습을 높이 평가한다. 설령 박해가 계속되고 바울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낄 만큼 상황이 악화되어 다른 도시로 옮겨 가야 했지만, 데살로니가의 성도들과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의 신앙을 지도했다. 디모데나 실라를 보내거나, 직접 방문하기 어려우면 편지를 써서 교회를 단단히 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유기체 교회 개척 모델"이라고 부르는데, 한 지역을 개척하고 일정 기간 뒤엔 다른 곳으로 이동하되, 완전히 손을 놓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다시 지원군을 보내거나 지침을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틀 안에서 교회들이 서로 재정과 인력을 나누어 쓰며, 하나의 몸처럼 움직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데살로니가가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다수 회심한 곳"이라는 사실이, 선교적 관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스 문명을 대표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이 수용된 것은, 기독교가 단순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작은 분파가 아니라 세계적인 진리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결정적 전환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귀부인들까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가정과 연관 네트워크도 복음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가정 교회(house church)' 형태로 시작되어, 사회적·문화적 장벽을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은 "바울이 자기 동족을 끊임없이 찾아간 것처럼, 우리도 본래 거부하거나 핍박하던 이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태도로 다가서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은 쉽게 원한을 쌓지 않으며, 끝까지 사랑의 손길을 뻗는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가 없으면, 교회는 내부 갈등이나 사회적 편견 앞에서 쉽게 분열되고 만다. 그러나 바울은 돌에 맞아 쓰러져 죽을 뻔했어도 다시 그 지역을 찾아가는 등, 사랑을 실천하는 열정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그 결과, 유대인 선민의 전통과 헬라 문화권의 지성이 함께 어우러지는 놀라운 '연합의 교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현대 교회가 민족·문화·교단 간 장벽을 세우고, 자기 그룹만 인정하는 고립 상태"에 빠지지 않았는지 점검해 보라고 요청한다. 초대교회는 정반대였다. 한편에서는 유대인들이, 또 다른 편에서는 헬라인들이, 심지어 경제적으로 넉넉한 귀부인들까지 복음을 함께 받아들이고, 개개인이 가진 재능이나 자원을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도 이 모델을 따라가려면, 교회 간 협력, 선교사 파송과 재정 지원, 인력 순환 등을 활발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살로니가에서 시작된 이 연합의 움직임은 곧 베뢰아, 아덴, 고린도로 이어졌고, 결국 아시아와 유럽 곳곳으로 복음이 확산되는 초대교회의 역사적 기초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17장의 강론을 마무리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복음 전파의 실천적 적용"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전도자와 선교사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떡을 뗄 때 비로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장면(눅 24장 참조)과 같은 원리로,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말씀을 풀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살아 계신 주님을 직접 체험하는" 단계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뜻이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은 '내가 만난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지, 추상적 교리나 학문이 아니다"고 힘주어 말한다.
둘째, "말씀을 전할 때에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의 정수를 절대 놓치지 말라"고 강조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집중적으로 강론했던 것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으며, 왜 다시 살아나야 했는가"에 대한 해설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강단이든 선교 현장이든, 다른 주제를 아무리 풍성하게 다룬다 해도 십자가와 부활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영혼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거듭나는 역사는 일어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셋째, "교회 안에서 분열 대신 연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장재형 목사는 행 17장 5절 이하에서 유대인들이 시기와 질투로 바울을 몰아내려 했듯이, 교회에서도 시기와 질투가 나타나면 쉽게 분쟁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를 넘어서서,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다른 지역 교회가 재정을 보내고, 인력이 필요하면 동역자를 파송하며, 서로 기도와 사랑을 주고받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바울이 곧바로 다른 도시로 떠나도 교회가 튼튼히 살아남아 계속 성장했다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분석이다.
넷째, "복음 전도자는 끊임없이 움직이되, 결코 완전히 떠나버리지는 말라"는 충고다. 바울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를 지나고, 또 에베소로 가서 2~3년 사역하며 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어디서나 '상주 목회'를 고수하지 않았고, 준비된 성도들을 세워놓고는 곧 떠나면서도 여러 경로로 계속 돌보는 방식을 택했다. 이를 통해 교회는 바울 개인에게 종속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자립하되, 필요 시에는 다시 도움받을 수 있는 활발한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장재형 목사는 현대 목회나 선교도 이러한 구조적 유연성이 있어야 더 빠르고 폭넓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재정과 물질을 함께 나누는 사랑이 실천되어야 한다." 바울은 자비량 사역(천막 제조)을 병행했으나, 빌립보 교회처럼 외부 교회가 적극 지원을 해 주면 전도와 목양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선교지에서 혹은 국내외 여러 교회 간에, 이런 상호 지원이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성도 간의 교제'(코이노니아)의 본질 중 하나이며, 교회가 몸 된 지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사도행전 17장의 흐름을 토대로 "초대교회의 생동감과 역동성을 이 시대에 재현하자"는 데 귀결된다. 데살로니가에 복음이 전해지며 일어난 변화-유대인·헬라인·귀부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교회의 탄생-는 교회가 가져야 할 연합의 이상을 보여준다. 또한 그 교회가 안정될 즈음, 바울은 새 땅을 개척하기 위해 다시 떠나면서도 디모데, 실라, 누가를 적절하게 재배치하며 데살로니가 교회를 끝까지 돌보았다. 이처럼 "흩어지지만 연결되어 있고, 멀어지되 결코 끊어지지 않는" 네트워크가 초대교회 선교의 원형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모델을 바탕으로, 전 세계 161개국(또는 그 이상)에서 사역하는 수많은 선교사와 전도자들이 "바울의 패턴"을 체득하기를 권면한다. 혼자 짐을 지거나 모든 책임을 떠안지 말고, 교회와 단체가 서로 돕고, 시기와 질투를 넘어 연합하며, 가장 중요한 복음의 본질을 흔들림 없이 선포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재정과 인력을 나누어 쓰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스스로 번식하듯 확장될 것이며, 초대교회가 경험했던 "폭발적 복음 전파"가 오늘날에도 재현될 수 있다고 본다.
이어서 장재형 목사는 데살로니가, 빌립보, 고린도, 에베소 등 바울이 개척한 지역에서 기록된 바울 서신을 함께 공부해 보라고 독려한다. 사도행전을 전후하여 각각의 서신이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 알면, 바울이 어떤 고민으로 교회를 돌보고 있었는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면서도 "기뻐하라"는 메시지가 주류를 이룬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종말론 이슈와 실제 생활 윤리에 대한 교정이 주요 내용이다. 고린도전후서는 은사 문제와 분쟁 문제를 다루며, 에베소서는 교회의 우주적·보편적 차원을 강조한다. 모두가 '개척된 교회'를 돌보는 과정에서 바울이 남긴 신앙적 유산이자, 현대 교회가 배워야 할 중요한 원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재형 목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사랑하는 태도"를 거듭 호소한다. 빌립보나 데살로니가 모두 바울과 동역자들이 '피 흘리고 땀 흘리며' 세운 교회였으나, 그들은 결코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사역을 통틀어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증언하고,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달려갔다. 이 같은 겸손과 열정이 있었기에 바울은 수없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고, 매를 맞아도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바울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로 증명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정리한다.
결과적으로, 사도행전 17장은 단순히 데살로니가에서 벌어진 한 교회 개척 사건이 아니라, 유럽 선교가 본격적으로 확장되는 중대한 전환점이다. 지적인 헬라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귀부인들까지 회심하며, 그 토대 위에서 교회가 자라나고, 동시에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예배하는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장면은 "보편적 복음"이란 말이 왜 가능한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오늘날 교회가 주목해야 한다며, "우리는 모두 이 초대교회 열정과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힘주어 역설한다.
그가 말하는 '회복'이란, 복음 전도자의 마음가짐을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고정하는 동시에, 교회 공동체가 분열이나 사소한 다툼을 넘어 연합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보냄받은 자들은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 영혼을 찾아 나서야 한다. 한 손에는 복음의 진리를, 다른 손에는 동역과 연합의 네트워크를 움켜쥐고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가 움직일 때, 수십 년이 지나더라도 그 불길이 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덧붙인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점을 우리 시대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성도가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오늘날 교회가 지향해야 할 세 가지 기둥을 제시한다. 첫째, "복음의 본질(십자가와 부활)을 흔들림 없이 전하라." 둘째, "서로 돕고 돌보며,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를 지원하되, 한곳에만 머물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 셋째, "회심자들의 신앙을 끝까지 책임지는 애정 어린 관심을 놓치지 말라." 이 세 가지가 어우러질 때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하나의 유기체로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갈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장재형 목사는 "30주년을 지나 더 큰 사명을 붙들고자 하는 우리 공동체가 이 길을 따라갈 때, 지금껏 보지 못했던 '성령의 폭발적 역사'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실제로 161개국(혹은 그 이상의) 많은 선교지에서 복음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음을 언급하며, 그곳에서 사역하는 이들이 모두 함께 이 사도행전적 원리를 붙들고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면, 교회는 결코 분열하지 않고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도행전 17장의 데살로니가 사건은 결국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고난 중에서도 복음은 승리한다"는 사실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확신이야말로 오늘날에도 계속 전진할 힘과 용기를 준다고, 그는 결론지으며 설교를 마무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