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죽음의 두려움과 '부활·영생' 복음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해 이전 세대보다 훨씬 건강하고 안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대재앙이나 전염병, 천재지변 등과 마주하게 되면, 인간은 순식간에 무력감을 느끼고 죽음의 공포 앞에 선다. 실제로 전 세계가 전염병(역병)의 위협을 직면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의 크리스천투데이(Christian Today) 기사에서 보도된 바처럼,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복음을 찾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수도 함께 급증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왜 이렇게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고, 예배를 찾고, 복음을 갈망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한 이유를 "모두가 죽음의 두려움에 맞닥뜨려, 살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에 이끌리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음보다 생명을 택하고, 멸망보다 구원을 바란다. 특히 역병이라는 전 지구적 위기 상황이 오면, 이전에는 "죽음은 내 일이 아니다"라고 여겼던 사람들조차도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근원적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기독교 복음의 가장 큰 메시지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라는 말씀에 다시금 시선을 돌리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가 단순한 종교적 슬로건이 아니라, 인류의 궁극적 과제인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임을 강조한다.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부활과 영생"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메시지다. 어느 종교 창시자나 철학자도 궁극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무덤에 갇히면 그곳이 마지막이 되었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 인생의 결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그 무덤을 비우셨고, 이것이야말로 기독교가 말하는 '빈무덤 사건'의 혁명성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는 메시지가,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고 믿어 왔던 세상에 한 줄기 빛으로 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활의 선포가, 역병이나 전쟁, 재난, 질병 등 어느 시대와 상황에서든지,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인간들에게 길을 열어 준다.
장재형목사가 교회 공동체에 권면해 왔듯이, 많은 성도들이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특별히 붙들고 살았던 말씀이 요한복음 11장 25-26절이었다. 이 구절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담고 있다. 여기서 "죽어도 살겠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영생을 의미한다고 장재형목사는 풀이한다. 부활과 영생, 이 두 축이야말로 기독교가 가진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며, 죽음의 역병을 두려워하는 시대에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는 근본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로마서 1장은 인간이 살아 있으나 실제로는 죽은 상태라고 선언한다. 죄 가운데 빠져 의의 길을 잃어버린 인간 실존이 이미 '사망'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죽어도 산다"라고 말씀하시니, 이는 '죄에서 죽고 의로 살아나는' 은혜를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묵상할 때, 우리는 이 구절들이 얼마나 깊은 진리로 연결되는지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의 궁극적 문제는 결국 죄와 죽음이며, 그 해답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장재형목사는 과거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수련회에서 요한복음 13~19장을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였다. 그는 십자가의 길이 곧 부활의 길이라고 선언하였고, 요한복음 마지막 장면(20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주목했다. 네 번째 복음서(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사도들보다 먼저 빈무덤에 이르렀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그 여인을 움직였다고 기록한다. 아가서 8장 6절에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 부활 사건을 통해 밝혀진 바는 '사랑이 죽음을 이긴다'는 더욱 강력한 선언이다. 장재형목사는 사순절에 십자가를 묵상하는 이유가 바로 이 '죽음을 이긴 사랑'을 깊이 깨닫기 위함이며, 수난의 깊은 세계를 알 때에야 비로소 주님의 부활 또한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고 역설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빈무덤에서 울던 장면은 주님의 시신을 어떻게 하든 모셔 가려는 그녀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준다.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헌신적 태도는, 이미 십자가와 무덤을 넘어 계신 예수님을 만나도록 이끄는 촉매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오늘날 유럽의 교회들이 단지 관광지나 유적지로 전락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 "주님의 시신을 기념하고 귀히 여기는 것" 자체도 존귀하나, 마리아가 지닌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이 없으면 결국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통찰을 제시한다. 실제로 유럽의 웅장한 성당과 교회들은 역사적으로 찬란한 신앙의 유산이지만, 이제 예배자가 떠나고 생명력이 사라진 채 건물만 남은 곳도 많다. 그는 이것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에 정성껏 싸서 둔 것"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살아 계신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마리아가 보여 준 죽음보다 강한 사랑과 갈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사순절의 40일은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고, 부활 이후 40일은 부활을 통해 드러난 생명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을 더 풍성히 누리는 기간이다. 장재형목사는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을 확인한 뒤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오순절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것처럼, 성도들도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함께 깊이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십자가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능력'이라는 두 축을 함께 바라봐야만, 진정으로 죽음을 넘어선 신앙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역병의 시대에 수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는 이유는 죽음의 문제 앞에서 '부활과 영생'을 외치는 기독교 복음이야말로 생명에 대한 갈급함을 해소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복음의 메시지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안에서 완성된다. 온라인 예배로든 오프라인 예배로든, 사람들은 '살고자 하는 본능'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궁극적인 해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장재형목사는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십자가' 사건을 깊이 묵상하고 통과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단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만을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죽으셨는지, 무엇을 위해 죽으셨는지를 아는 것이 부활 신앙의 기초라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는 구절은 십자가와 부활의 핵심을 한 문장에 집약한 대표적 본문이 된다.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었다"는 대목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는 대속(代贖)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율법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선언하기에, 죄를 지은 자는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이 죄값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무죄하신 예수께서 대신 죄값을 짊어지신 것이다. 이는 구약 레위기 제사법에서 속죄 제물로 사용된 양이나 염소가 사람들의 죄를 전가받아 대신 죽임을 당함으로써, 죄인들이 해방되는 원리와 맞닿아 있다. 성경은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히 13:12)라고 하면서, 이 구약의 희생제사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연결한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무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어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이는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죄와 사망 아래 놓인 상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5장은 이 점을 대표이론(Federal Headship)의 관점에서 풀어낸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으나, 또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표이론이 "왜 예수님이 하필이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는가"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고 말한다. 죄를 범하지 않으신 예수님이 인류의 대표가 되어 죽으셨기 때문에, 그 죽음이 곧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 대속이 '우리의 죄 사함'이 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대속 개념이 기독교 신앙의 뿌리라고 강조하면서, "죄인이 진작 받아야 할 벌을 예수님이 대신 지셨으니, 죄인이 정당화(Justify)되어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는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파한다.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셨다"는 말씀은, 인간의 범죄를 '예수님이 자동으로 해결해 주셨다'는 식으로 가볍게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 깊은 고통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가 함께 담긴 사건임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안 내주셔도 되었을" 텐데, 굳이 내주셨다는 사실은 은혜(Grace)가 얼마나 놀라운지, 그리고 그것이 율법의 공의(Justice)와 어떻게 부딪히고 조화를 이루는지 보여 준다.
이 대속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고 바울은 말한다. 이는 부활이 "모든 구원 사건을 확증하고 완성하는 증거"라는 의미다. 십자가의 죽음이 죄값을 치른 것이라면,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새로운 생명이 인류에게 열렸음을 선포한다. 만약 예수님이 단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났다면, 그 대속의 효과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한다는 확신은 부족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실제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죄의 삯인 죽음을 깨뜨려 버리셨고, 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장재형목사는 설명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이 고백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구절은, 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믿는 자 개인의 실존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 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내가' 함께 죽은 것이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내가' 함께 살아났다는 영적 실재다. 이 고백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죄와 사망이 더 이상 나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신앙적 선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대표이론의 극치"라고 일컫는다. 예수님이 아담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 생명을 대표하고 계시기에, 예수님에게 접붙은 사람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자기 것'으로 삼아 죄 사함과 의로움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부활은 십자가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십자가는 부활로써 완성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둘을 떼어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러 강연과 설교에서 반복해 왔다. 십자가만 강조하다 보면 "죽음"에 머물기 쉽고, 부활만 강조하다 보면 "죄와 심판"의 문제가 경시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과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함께 선포한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죄와 죽음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참된 자유와 생명을 허락하는 길이 된다. 율법적으로 보면 사망이 마땅하지만, 은혜로 말미암아 의가 선포되는 이 신비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라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3. 부활신앙과 우리의 실제 삶부활절을 맞이하여 교회에서 각종 예배와 축하 행사가 열리고,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다면, 그다음 물음은 언제나 "그러면 부활 신앙이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이다. 장재형목사는 "부활"을 한 번 기념하고 끝나는 종교적 이벤트로 만들지 말고, 일상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능력'으로 경험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 40일을 함께 지내고, 주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을 받아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부활신앙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통찰을 얻게 된다. 첫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들은 역병이 닥쳤을 때 죽음을 강하게 인식한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믿는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요한복음 11장 25절의 약속이 현실이 된다고 확신하기에, 세상적 불안과 공포를 초월할 힘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은 믿음은 결코 무모하거나 비현실적인 환상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가 실재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뿌리를 둔다는 점이 중요하다. 장재형목사는 부활이 단순한 심령적 체험이나 환상이 아니라, 무덤이 빈 것을 확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셨으며, 제자들이 이 사실을 전 세계에 증언해 왔다는 역사적 근거가 있음을 늘 강조한다.
둘째, 부활은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지향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이미 죽었다. 이제 내 안에 사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인식이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선언이다. 그렇게 되면 삶의 목적이 '자아 실현'이나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두고,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사랑과 희생, 봉사, 섬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음을 넘어선 생명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손해나 고난이 결정적 파멸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셋째, 교회 공동체가 '생명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부활신앙이 개인의 내면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교회와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려면, 교회가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유럽의 수많은 교회가 역사적 유적지와 관광지로 바뀐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건물만 웅장할 뿐, 거기서 예배하는 사람이나 살아 계신 예수님과의 역동적 만남이 없다면, 결국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 시신을 싸서 정성스럽게 보존했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시신을 가져가겠다"는 사랑과 열망으로 빈무덤에 달려간 마음이 있다면, 주님이 실제로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사랑과 갈망이 교회 안에 넘치게 될 때,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금-여기에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넷째, 부활 이후 40일의 의미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장재형목사의 조언도 눈여겨볼 만하다. 사순절 40일이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간이라면, 부활 이후 40일은 그리스도의 승리, 생명, 그리고 사랑을 더 깊이 묵상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 사건을 직접 보고서도 쉽사리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지내며, 말씀을 다시 확인하고, 서로 간증을 나누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이 승천하시자, 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복음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교리'나 '기념일'로만 지나쳐 버리지 말고, 초대교회 제자들이 걸었던 길을 체험적으로 밟아나갈 때, 부활 신앙의 능력이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한편, 부활신앙은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누가복음 24장)의 이야기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들을 자주 설교하면서, "엠마오 제자들이 떡을 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본 장면은, 십자가의 죽음이 '사랑의 사건'임을 깨달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비로소 알아볼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역설한다. 사랑이 죽음을 이겼고, 그 사랑을 깨닫는 이에게 부활의 증거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요 20:13)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가 눈물과 비통함에 빠져 있을 때에도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울음이 너무 커서, 혹은 현실의 고통이 너무 깊어서 주님이 옆에 계신 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이것이 부활 전후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이었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부활 신앙은, "이미 와 계신 주님"을 인식하고 만나는 데에서 출발한다.
궁극적으로, 장재형목사는 부활이야말로 역병과 전쟁, 재난과 죽음의 위협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유일하고도 확실한 소망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죽음의 감옥에 갇힌 인생을 해방하신 주님의 능력은,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그 생명력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교회 공동체와 인류 전체를 새롭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한 역사 속 한 사건"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믿는 자들에게 실질적인 능력으로 임하기에, 우리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그 약속을 붙들 수 있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한결같다. "십자가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표징이며, 부활은 그 사랑이 실제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열어 보이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절을 비롯하여 사순절과 그 이후 40일 동안 이 말씀들을 깊이 묵상할 때, 단순히 한 해의 교회력 행사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실존에 대한 뿌리 깊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죽음의 두려움과 죄의 무게에서 해방되어, 의롭다 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길-그것이 바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부활신앙이다. 그리고 이 신앙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든, 절망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을 열어 주는 하나님의 초대이기도 하다. 교회가 이 부활 신앙을 선포하고 실천할 때, 유럽의 웅장한 교회들이 단순히 관광지가 아니라, 다시금 생명이 약동하는 예배의 처소로 변화할 수 있다는 비전을 품게 된다.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든,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서든, 우리는 이 위대한 복음을 전하며 살아 계신 주님을 오늘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전해 온, 그리고 계속해서 전하고 있는 '부활과 영생' 복음의 정수라 할 수 있다.

















